분황사는 신라 634년 창건된 사찰이다. 『삼국유사』에는 이 절터를 전불시대(前佛時代) 7처가람 터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분황사에는 창건 이후 자장(慈藏)과 원효(元曉) 등 고승이 머물렀다. 원효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설총(薛聰)이 그 유해를 부수어 소상(塑像) 진용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다고 전한다.
755년(경덕왕 14) 강고(强古) 내말(乃末)이 30만 6700근의 분황사 약사여래동상을 주조하였다고 전하며, 희명(希明)의 아들이 눈이 멀자 이 절의 천수대비에게 기도하고 눈을 떴다는 이야기 등 신라 때 이 절의 위상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고려 숙종 때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명종 때 한문준이 화쟁국사비를 이 절에 세웠는데, 현재 비신은 없고 비부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 분황사 관련 기록은 사세가 쇠퇴하였거나 폐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전한다. 현재 이 절에는 창건 당시 세워진 국보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慶州 芬皇寺 模塼石塔)을 비롯하여 중문, 보광전, 요사채, 종각 등이 있다.
분황사지는 1990~2014년 걸쳐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전체 사역과 각 시기별 가람의 변천을 확인할 수 있다. 분황사 창건 가람은 석탑을 남쪽에 두고 그 북쪽에 ‘품(品)’자 형 금당을 배치한 소위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 가람 배치를 보인다. 이러한 배치는 고구려의 청암리사지, 정릉사지 등과 유사하다. 이후 3차례에 걸쳐 가람이 변하였다.
1차 중건 가람은 금당 이외에 강당, 중문, 남회랑 등을 추가 건립하고 경역을 대폭 확장하였다. 이 가람은 8세기 중엽부터 13세기 전반 몽골 침입으로 소실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2차 중건 가람은 규모가 대폭 축소되고 서향한 금당이 건립되었다. 그 시기는 대체로 13세기 후반 이후부터 15세기 후반 이전으로 여겨진다.
3차 중건 가람은 현재 분황사 금당인 보광전을 중심으로 한 가람을 말한다.
한편, 1998년 보광전 해체 수리 과정에서 확인된 상량문과 명문기와 등을 살펴볼 때, 1608년(광해군 1) 기존 금당의 1/3 규모인 보광전을 중심으로 절의 규모가 축소되었다. 이때 확정된 사역과 조성된 전각은 몇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라 왕경 중심부에 위치한 분황사지는 문헌 기록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장기간의 체계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가람의 배치 양상과 변천 과정, 경역의 대부분을 규명하여 역사적 ·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또한,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화쟁국사 비부, 석정(石井), 석조(石槽), 초석(礎石), 석등(石燈), 대석(臺石)과 사경(寺境), 당간지주 등 다양한 유물 ·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2019년 2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