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계사 탑다라니판(華溪寺 塔陀羅尼板)은 1873년(고종 10) 화계사에서 성월 등이 불탑으로 형상화한 다라니를 조성한 목판이다. 이 탑다라니판을 조성한 성월과 보원 등이 비록 신분이 낮아 궁궐의 하급 잡직으로 근무하였으나, 왕실의 신정왕후를 배후로 풍양조씨와 교류하면서 신앙 단체를 운영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제작된 탑다라니판 3종이 현재까지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조선 후기 다라니 신앙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이 인정되어 2016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부처가 입멸(入滅)한 이후 그가 남긴 말씀과 진신(眞身)은 사리(舍利) 형태로 승화되어 불탑(佛塔)에 봉안되기 시작하였다. 부처의 진신은 입멸 직후에 다비(茶毘) 의식을 거쳐 수습한 이후 여러 지역으로 분골되어 부도[불탑]에 봉안되었다.
또한 부처가 설법한 말씀을 담은 불경은 입멸 후 3백 년이 지나서 편찬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불경은 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어 법사리(法舍利) 형태로 존중되었다.
그리고 후대에 진신을 모신 불탑에서 변용되어 목판에 불경을 다층탑 형태의 도형에 새겨서 찍어 낸 것[塔印]을 일반적으로 탑다라니(塔陀羅尼)라고 하며, 이 탑인본(塔印本)을 법사리의 범주로 포함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석장사지(錫杖寺址)에서 발굴된 「연기법송명탑상문전(緣起法頌銘塔像文塼)」에는 벽돌의 표면에 불상과 불탑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이미 7세기 무렵에 탑다라니가 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로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사리기(舍利器)를 비롯하여 서산 보원사지(普願寺址) 5층석탑 사리기와 해인사 도서 탑다라니판 등에서 탑다라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목판에 『 금강경(金剛經)』과 진언 등을 새긴 탑다라니판이 간혹 사찰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탑다라니는 주로 한자를 사용하는 대승불교 문화권을 중심으로 불경과 진언 등을 탑형(塔形)의 도상에 배치하는 형식으로 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에 다라니 공덕(功德)에 대한 이해가 퍼지면서 사찰에서 탑다라니를 판각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현재 서울특별시에 있는 화계사에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아래의 탑다라니판 3종이 보관되어 있다.
① 비로자나장엄장대누각탑다라니판(毘盧遮那莊嚴藏大樓閣塔陀羅尼板)
이 탑다라니는 비로자나장엄장누각에 올라가 미륵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내용을 형상화하여 판각한 목판이다. 비로자나장엄장누각은 『 화엄경(華嚴經)』 권77의 「입법계품」에서 선재 동자가 남쪽 해안국의 누각에 올라가 미륵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미륵보살을 만나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탑다라니판은 모두 8매의 판재가 가로로 연결한 상태이며, 전체 크기는 197.5 × 73㎝이다. 탑신은 다층 누각 형태를 잘 표현하여 정교하게 판각되어 있는데,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판면 좌측 상단에는 ‘비로자나장엄장대누각(毘盧遮那莊嚴藏大樓閣)’이란 탑신 명칭이 새겨져 있고, 우측 하단에는 ‘동치계유단양일 비구환진경식 거사성월근서 보원대명진정명대자비생참정(同治癸酉端陽日 比丘喚眞敬識 居士性月謹書 普圓對明眞正明大慈行參訂)’이라는 판각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져 있다.
이 기록으로 탑신의 명칭이 ‘비로자나장엄장대누각’이란 사실과 1873년(고종 10) 단오에 거사 성월(性月)이 판서하였고, 이를 보원(普圓) 등이 참정한 사실을 비구 환진이 기록하였다.
② 원통궁전탑다라니판(圓通宮殿塔陀羅尼板)
불가에서 원통전은 관음보살이 머무르는 곳으로 이를 형상화하고 『 천수경(千手經)』을 새겨 탑다라니를 조성한 것이다. 이 탑다라니는 모두 6판의 판재를 연결하여 상단에는 진언을 실담자와 한글로 병기하고 하단은 『천수경』을 국한으로 병기하여 제작하였다.
목판의 보존 상태는 전체적으로 양호하며, 전체 크기는 150.4 × 66.8㎝이다. 탑신의 상층부에는 만개한 연화를 배치하고 옥개석의 좌우에 풍탁이 달려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여 정교하게 판각한 상태이다.
판면 좌측 상단에는 ‘원통궁전(圓通宮殿)’이란 명칭이 국한병기 방식(원圓통通궁宮전殿)으로 새겨져 있고, 우측 하단에는 "세소양(계)작악(유)결하일보광거사보원경찬 / 인담거사성월근서(歲昭陽(癸)作噩(酉)結夏日葆光居士普圓敬讚 / 印潭居士性月謹書)"라는 판각과 관련된 기록이 2행으로 새겨져 있다.
이 기록으로 탑신의 명칭이 '원통궁전'이라는 사실과 1873년 여름에 인담거사 성월이 판서하여 제작한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판각 사실을 보광거사 보원이 기록하였다.
③ 연화고향탑다라니판(蓮華故鄕塔陀羅尼板)
이 탑다라니판은 모두 5판의 판재를 연결하여 제작하였으며, 전체 크기는 128.5 × 68.5㎝이다. 탑신의 상층부에는 만개한 연화가 배치되어 있고 삼층의 옥개석 좌우로 풍탁이 걸려 있는 보탑의 모습을 잘 형상화하여 정교하게 판각한 상태이다.
탑신의 중앙에 여래상(如來像) 한 구가 배치되어 있다. 판면의 좌측 상단에 ‘연화고향(蓮華故鄕)’이라는 명칭이 새겨져 있으나, 앞의 2종과는 달리 판각 기록은 없다. 목판은 전체적으로 훼손된 부분이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상기한 3종의 탑다라니판은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뒤틀림 및 갈라짐 현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잘 가공된 판재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판면은 주사(朱砂)가 덧칠된 상태로 보아 이전에 여러 번 찍어 낸 것으로 보인다.
이 3종의 탑다라니 조성에 참여한 성월과 보원 등은 다른 7인과 함께 전년인 1872년(고종 9)에 화계사의 삼성암(三聖庵)을 창건하여 신행 활동을 전개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신분이 낮은 중인(中人) 출신으로 주로 궁궐의 잡직(雜職)과 하급 무관직을 지낸 인물들로 이 무렵에 ‘정원사(淨願社)’와 ‘감로사(甘露社)’라는 신앙 단체를 조직하여 다양한 서적을 출판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간행한 서적의 면면으로 보아 그 무렵 유행하던 청대(淸代)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도교와 습합된 신불 행태를 보이고 있다.
3종의 탑다라니판을 조성한 성월과 보원 등이 비록 신분이 낮아 궁궐의 하급 잡직으로 근무하였으나, 왕실의 신정왕후(神貞王后)를 배후로 풍양조씨(豐壤趙氏)와 교류하면서 신앙 단체를 운영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제작된 탑다라니판 3종이 현재까지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조선 후기 다라니 신앙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2016년 8월 4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