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蔡永)은 188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만주, 러시아 연해주에서 채영(蔡英)이라는 이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919년 만주에서 북간도(北間島) 지역 한인들이 결집한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조직을 주도하였다. 대한국민회는 1910년대 결성된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와 간민회(墾民會)를 기반으로 하였다. 북간도 한인 사회의 자치와 민족주의 교육,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 대한국민회로 개편하며, 임시정부 직할의 북간도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단체임을 선언하였다.
1919년 9월 만주 훈춘〔琿春〕에서 대한국민회 산하에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결사대는 국내 무장투쟁을 계획하는 한편, 1920년 초 연해주 니콜스크(지금의 우수리스크)에서 강국모(姜國模) · 한희진(韓熙鎭) 등과 대한민국 혈성단(大韓國民血誠團, 이하 혈성단)을 조직하였다.
혈성단 사령관에 취임한 채영은 1921년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3월 하마탕〔蛤蟆塘〕에서 북간도 동부와 훈춘, 노령(露領)의 각 독립단 대표자회의가 개최되자, 홍범도(洪範圖) · 구춘선(具春先) · 이범윤(李範允) · 황병길(黃丙吉) 등과 참석하여 각 독립단의 통일 문제를 논의하였다.
1921년에는 소련의 원조하에 한인 연합부대인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에 참여하여 고려혁명군관학교(高麗革命軍官學校)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6월 러시아 흑룡주(黑龍州) 스보보드니(Svobodnyi)에서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자유시참변)이 일어날 당시 혈성단을 이끌고 대한의용군에 참여하여 참모부원으로 러시아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1923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격론이 이어진 국민대표회의에서 국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러시아 니콜스크 연변의 이만(Iman)에 돌아와 활동하다가 러시아와 중국 국경인 포그라니치니역에서 자객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200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