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검찰요보』는 1944년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에서 경제사건과 사상사건, 보통형사사건 등 조선의 치안 상황을 조사 보고한 내용을 담아 간행한 내부 잡지이다. 1945년 5월 제15호까지 매월 간행되었다. 『조선검찰요보』의 구성은 「자료」, 「조사」, 「특수사건」, 「통계」, 「통첩류」, 「재판례」, 「회동점묘」, 「잡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검찰요보(朝鮮檢察要報)』는 1944년 3월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에서 기존에 간행하던 『경제휘보(經濟彙報)』와 『치안특보(治安特報)』를 해소하고, 두 잡지의 내용에 보통형사사건을 추가하여 발간하였다. 1945년 5월 제15호까지 매월 간행되었다. 영남대학교 도서관과 재단법인 한국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각 호의 쪽수는 제1호 67쪽이 가장 많고, 제3호 31쪽이 가장 적다. 발행부수는 300부로, 표지에 ‘극비’, ‘취급주의’라는 표시와 함께 간행 일련번호가 찍혀 있어, 외부로의 유출를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발행 목적은 현직 검사들의 업무 참고와 조선총독부의 검찰송부 사건 관리를 위해, 일제 지배에 저항하는 사상사건, 경제사건, 전시 형사령 공포에 따른 보통형사사건의 추이를 살피기 위한 것이었다. 서로 다른 성격의 3개 사건을 별도로 다루지 않고, 하나의 잡지에 통합한 것은 주1 말기에 이르러, 전시 물자 부족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조선검찰요보』의 구성은 「자료」, 「조사」, 「특수사건」, 「통계」, 「통첩(通牒)류」, 「재판례」, 「회동점묘(會同點描)」, 「잡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료」는 매호 빠짐없이 실렸는데, 각 지방법원의 보고, 일본에서 발행된 검찰 관계 잡지 중 조선 관련 부분의 번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지방법원의 보고서는 각각 관할구역 내의 상황과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전 조선의 상황을 놓고 보고가 이루어져 중요한 정보들을 많이 담고 있다. 그 외에 통제경제의 실상과 관련한 각종 통계와 경제 현황, 경제경찰 관련 대책 등도 수록되었다. 「조사」는 통계를 토대로 각 사건의 내용과 흐름을 분석하는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제10호의 「국민징용령 위반사건의 개요」가 대표적이다. 제1호와 4호, 68호, 1012호에 수록되었다. 「특수사건」은 「자료」와 함께 매호 빠짐없이 실렸다. 사상사건과 경제사건이외에도 일반 형사사건 중 특징적인 것을 다양하게 다루었다. 「통계」는 제1호에만 수록되어 있는데, 1943년의 사상사건과 경제사건, 전시특별범죄 사건의 통계를 다루었다. 「회동점묘」는 「전선 경제계검사 타합회」, 「4개도 경제경찰과장 연락회의」 등과 같이 주로 경제경찰의 회의를 다루었다. 「재판례」는 법원의 판결 중 법률해석상 의미있는 판결의 판례로 구성되어 있다.
제1호에 수록된 「임시육군특별지원병의 동향 일반」 보고서는 당시 학병 강제동원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43년 11월 25일 함경북도 지원자는 지원대상자[적격자] 353명 중 256명이었는데, 그 중 자발적 지원자는 10명 내외에 불과했다. 평안남도의 경우는 지원자가 지원대상자 667명 중 415명이었는데, 그 중 자발적 지원자는 27명에 그쳤다. 이렇게 강요에 의해 지원했기 때문에 지원자들은 지원검사장에서 대부분 불량한 태도를 보였다. 불합격되면 소 한 마리를 잡아 축배를 들겠다는 지원자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원자들은 대부분 합격 판정을 받았다. 지원자들은 병과 선택에서도 대부분 전투병과가 아닌 헌병 · 위생 · 행정부를 희망했다. 징병 지원을 기피하기 위해 신체를 훼손하거나 호적을 고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전형장에서의 반도인의 징용기피의 실상」[제10호], 「국민징용령 위반사건의 개요」[11호] 보고서를 보면 일제의 징용에 대해 조선인들은 대부분 기피했으며, 전형장에서 질병진단서를 제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징용전형 이전이나 징용명령서 교부전, 징용되어 가는 도중, 징용되어 작업 도중에 도주하는 등, 도주를 통해 징용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일제는 각 지역 징용할당자의 3~4배에 이르는 출두명령서를 발부하고, 출두자의 상당수를 합격시켜 억지로 할당량을 채웠다.
1943~1945년 시기는 일제의 탄압과 통제로 조선의 신문과 잡지를 비롯한 각종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던 시기였다. 때문에 당시 상황과 조선인들의 동향을 잘 파악할 수 없었다. 『조선검찰요보』는 당시의 시기를 비록 지배자의 입장이지만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매일신보』를 비롯해 총독부의 공식 언론 주장과 달리 조선총독부의 각종 전시 정책이 제대로 집행되고 있지 않은 실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학병과 징용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일제 경찰이 이에 깊이 개입해서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에 저항하고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