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생이다. 친형 윤방현의 아들 윤창현을 양자로 들였다.
1891년 증광시 역과에 합격하였다. 이후 관립외국어학교 내 영어학교 제1회 입학생으로 입학하여 1895년 졸업하였다. 1901년 영국 옥스퍼드대학 광산과를 마쳤으며, 1906~1908년에 궁내부 소속 관리로 일하였다. 이때 고종의 명에 따라 궁중의 서양 요리 책임자로 일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 주관 개국 기원절 행사 때 접객위원으로 일하고, 독립협회 소청[訴請] 경비 의연[1원] 명단에 오른 사실 등으로 볼 때 독립협회 활동을 직간접적으로 수행하고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1907년 3월, 인창학교 설립을 위한 발기인[총 16인]으로 참여하였다.
1909년 12월 25일 자 대한제국 「관보」에 따르면, 농상공부의 광업 주1를 받아 일제강점기 내내 광산업을 하였다. 1910년대 중반에는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이상필 등과 탄광을 경영하였다. 1920년 7월에 황해도 수안금광 기사를 사임하고 경성으로 왔으며, 이듬해 7월 30일 조선인산업대회 발기총회에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다. 이즈음부터 1930년대까지 평안북도 창성군 소재 갑암광산의 기사로 일하였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임명한 11명의 고문 중 한 명이었다. 1945년 연말, 조병옥 등 7인으로 구성된 방미 시찰단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듬해 3월 2일부로 미군정장관 러치에 의해 조선경제고문회[위원장 이훈구] 일원[총 7명]이 되어, 미군정청 중앙경제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6월 10일 뇌일혈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