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방직사건은 1951년 4월 귀속재산이었던 조선방직의 경영진이 고의로 불량 소재를 사용했다는 혐의로 구속된 이래, 1952년 3월 조선방직 파업이 종결될 때까지 조선방직회사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이다. 해방 후 일제의 적산 중 최대 방직공장이던 조선방직을 불하받을 유력 인물이 야당 국회의원 김지태였는데, 이승만 정부는 경영진을 구속하고 불하를 취소한 후 이승만의 심복 강일매로 하여금 경영권을 장악하게 하였고, 이에 반발하는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항의를 진압하였다. 그리고 조선방직은 이승만의 정치적 물질적 기반이 되었다.
조선방직사건은 1951년 3월 예정되어 있던 조선방직 주1를 위한 주2이 갑자기 취소되고 4월 8일 정호종, 김지태 이하 당시 주3과 노동조합위원장 등 수십 명이 구속되면서 시작되었다. 군복 제작에 고의로 불량 원료를 사용했다는 혐의였고, 이것이 적을 이롭게 한다는 이적행위 및 남조선노동당과 내통했다는 주4 혐의까지 덧붙여졌다. 그런데 이들은 조선방직이 불하될 경우 귀속재산처리법의 주5 조항에 의해 불하받을 것으로 확실시되던 대상자들이었다. 경영자측의 자금은 야당 국회의원이자 대자본가인 김지태가 마련할 계획이었고, 노동조합의 경우 종업원에게 후생용으로 지급하던 광목을 불하대금 마련을 위해 내놓게 할 계획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조선방직의 불하를 취소하고, 1951년 5월 말 귀속기업체 중 유일하게 조선방직을 주6로 지정하였다. 1951년 9월에는 조선방직의 새로운 관리자로 이승만의 심복이라 불리우는 강일매를 등장시켰다. 강일매는 독단적으로 자신의 세력 증식에 나서는 한편 기존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 주7를 단행했다. 이에 대해 조선방직 노동조합은 강하게 반발하며 주8에 돌입하였고, 1952년 3월 11일 파업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파업에 대한 경고 메세지가 나오자, 주9 성격이 짙었던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위원장 전진한 등이 여기에 굴복함으로서 단 하루의 파업은 성과 없이 막을 내리게 된다. 결국 조선방직은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물질적 기반으로 활용되었고, 1955년에는 조선방직 자체가 강일매에게 불하되었다. 반면 강일매 경영체제 퇴진을 시도했던 노동조합과 참여 노동자들은 대량 해고와 구속을 당해야 했다.
조선방직사건은 단순히 산업 경영에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 이승만 정부가 국가 귀속기업을 정치 자금 조달의 수단으로 삼으며 경영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점에서 주10와 권력 주11의 상징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1952년 정치파동에서 이승만이 승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의 정치과정과 결말은 이승만 장기독재의 출발점이라 볼 수 있다. 조선방직사건은 또한 새로운 경영진에 맞서던 노동자들의 저항이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의 굴복과 더불어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이후 국가와 기업의 힘이 압도적인 한국적 노사관계 형성의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