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들어 인구의 과도한 집중으로 다양한 도시문제가 발생하자 서울시는 문제 해결을 위해 지속적으로 도시계획을 검토 입안하였다. 그러나 재정과 관련 법 등의 문제로 쉽게 추진되지 못하였고, 이런 상황에서 1966년 4월 새로 서울시장에 취임한 김현옥은 서울을 확장하거나 기존 도심을 개발하는 방식이 아닌 새로운 행정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하였다. 그는 1966년 5월 27일 주1에서 비용 면에서 기존 도시를 재개발하기보다는 새 도시를 건설해 수도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고, 34천만 평의 넓이에 100만150만의 인구가 거주할 수 있는 '새서울백지계획'을 8월 15일까지 완성해 발표하겠다고 하였다. '백지계획'이란 도시 건설 후보지나 도시 지형, 그에 따른 여러 다른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백지 위에 설계한다는 의미였다.
서울시는 1966년 6월 하순 대한주택공사 단지연구실장 박병주에게 '새서울백지계획안'을 의뢰하였다. 이때 서울시가 제시한 조건은 4천만 평 정도의 넓이와 상주 인구 100만 내지 150만의 규모, 그리고 도시 외곽을 무궁화형으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박병주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3백만을 위한 현대도시'와 워싱턴 D.C.의 도시계획 방식을 참고해 계획안을 완성하였다. 중심 지구의 전체 틀은 두 개의 정사각형을 겹쳐 넣어 르 코르뷔지에의 구상을 약간 변형시켰고, 정사각형의 모서리에 북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대통령 주2,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배치해 워싱턴 D.C.의 배치 방식을 따랐다. 도시 중심은 워싱턴 D.C.와 달리 주3가 아닌 고층건물로 구성하였다.
박병주가 제작한 사방 2m의 모형과 도면은 1966년 8월 15일 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도시전시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앞서 김현옥 시장은 8월 11일 미처 완성되지 않은 박병주의 스케치를 도면화하여 '새서울백지계획안'을 발표하였다. 무궁화 꽃잎 모양의 새 도시는 5천만 평 토지에 인구 100~150만이 거주하도록 계획되었고, 주택지구 40%, 관공서 20%, 상업 5%, 경공업 5%, 녹지대 30%로 구성되었다. 도로율은 30%였다.
새서울백지계획이 발표되자 언론은 실현성이 없다고 비판하였고 야당에서도 196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발표된 선거용 공약이라고 비난하였다. 부정적 여론이 높아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원칙만 내세운 실현성이 약하고 막연한 계획이라고 평가하고 현실적인 도시계획을 지시하였다. 이로써 새서울백지계획은 구상에 그치고 실현되지 못하였다.
새서울백지계획은 1966년 5월 김현옥 서울시장의 즉흥적 발표로 시작되어 구체적 성과 없이 끝나버렸다. 입지나 다른 현실적 여건의 고려 없이 추진된 것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수도분리계획 구상으로서 건축학적으로는 르 코르뷔지에의 ‘3백만을 위한 현대도시’ 구상을 적용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고, 1970년대 말 주4 건설을 위한 백지계획’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