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경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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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왕의 귀 설화」는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귀에 관한 문헌 설화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경문 대왕의 귀’, ‘여이 설화(驢耳說話)’라고도 한다. 설화성이 매우 풍부하여 널리 구전되고 있고, 그 분포 지역이 국내뿐만 아니라 범세계적이다. 현대 문학을 비롯하여 연극과 뮤지컬, 영화 등 종합 예술 분야에서 현대적 재창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설화이다.
경문왕의 귀 설화 (景文王의 귀 說話)
「경문왕의 귀 설화」는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귀에 관한 문헌 설화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경문 대왕의 귀’, ‘여이 설화(驢耳說話)’라고도 한다. 설화성이 매우 풍부하여 널리 구전되고 있고, 그 분포 지역이 국내뿐만 아니라 범세계적이다. 현대 문학을 비롯하여 연극과 뮤지컬, 영화 등 종합 예술 분야에서 현대적 재창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설화이다.
남북국시대 때, 신라의 이찬 관등을 역임한 {귀족, 반란자}.
근종 (近宗)
남북국시대 때, 신라의 이찬 관등을 역임한 {귀족, 반란자}.
대구광역시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사리장엄구.
전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 (傳大邱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蠟石舍利壺)
대구광역시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사리장엄구.
통일신라의 제48대 경문왕의 누이로, 미륵불에 귀의하여 독실한 신자가 된 왕족.
단의장옹주 (端儀長翁主)
통일신라의 제48대 경문왕의 누이로, 미륵불에 귀의하여 독실한 신자가 된 왕족.
통일신라의 제48대 왕, 경문왕의 어머니로, 광의왕태후로 봉해진 왕족.
광화부인 (光和夫人)
통일신라의 제48대 왕, 경문왕의 어머니로, 광의왕태후로 봉해진 왕족.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집사성시중, 상대등 등을 역임한 관리이다. 862년(경문왕 2) 정월에 아찬(阿飡)의 관등으로 집사성(執事省) 시중이 되었고, 874년(경문왕 14)에는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이찬으로 승진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재직한 지 1년이 지난 875년에 헌강왕이 즉위하자 상대등에서 물러났다.
위진 (魏珍)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집사성시중, 상대등 등을 역임한 관리이다. 862년(경문왕 2) 정월에 아찬(阿飡)의 관등으로 집사성(執事省) 시중이 되었고, 874년(경문왕 14)에는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이찬으로 승진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재직한 지 1년이 지난 875년에 헌강왕이 즉위하자 상대등에서 물러났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48대 경문왕의 왕비.
영화부인 (寧花夫人)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48대 경문왕의 왕비.
경주 헌강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49대 헌강왕의 능이다. 경문왕의 아들로 875년에 즉위하여 12년간 재위하였다. 헌강왕을 보리사의 동남쪽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에 근거하여 헌강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흙으로 덮은 원형봉토분으로 남북 길이가 긴 장방형의 굴식돌방무덤이다. 널방의 벽면은 상부로 올라갈수록 안으로 기울었으며 구석 부분은 엇물려쌓기 방식으로 석재를 처리하고 있다. 무덤 보호석을 다듬은 돌을 사용하여 4단으로만 쌓아 올렸는데, 삼국통일 이후의 신라왕릉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것이다.
경주 헌강왕릉 (慶州 憲康王陵)
경주 헌강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49대 헌강왕의 능이다. 경문왕의 아들로 875년에 즉위하여 12년간 재위하였다. 헌강왕을 보리사의 동남쪽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에 근거하여 헌강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흙으로 덮은 원형봉토분으로 남북 길이가 긴 장방형의 굴식돌방무덤이다. 널방의 벽면은 상부로 올라갈수록 안으로 기울었으며 구석 부분은 엇물려쌓기 방식으로 석재를 처리하고 있다. 무덤 보호석을 다듬은 돌을 사용하여 4단으로만 쌓아 올렸는데, 삼국통일 이후의 신라왕릉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것이다.
통일신라의 제50대(재위: 886년~887년) 왕.
정강왕 (定康王)
통일신라의 제50대(재위: 886년~887년) 왕.
헌강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875~886년이며 아버지 경문왕을 이어 즉위했다. 부왕 때부터 시작된 국학 진흥활동에 박차를 가해 국학에 적극적이던 6두품 신분층의 정치적 성장이 이루어졌고 이들이 국왕의 지지세력으로 활약했다.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도 도모하여 황룡사에 백고좌강경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듣는 등 불교진흥에도 힘썼다. 백성들의 지붕은 기와로 이어졌고, 밥할 때 숯을 때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신라 최전성기의 왕으로, 당나라와 일본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헌강왕 (憲康王)
헌강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875~886년이며 아버지 경문왕을 이어 즉위했다. 부왕 때부터 시작된 국학 진흥활동에 박차를 가해 국학에 적극적이던 6두품 신분층의 정치적 성장이 이루어졌고 이들이 국왕의 지지세력으로 활약했다.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도 도모하여 황룡사에 백고좌강경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듣는 등 불교진흥에도 힘썼다. 백성들의 지붕은 기와로 이어졌고, 밥할 때 숯을 때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신라 최전성기의 왕으로, 당나라와 일본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헌안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7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857~861년이다. 문성왕 대에 상대등에 있다가 조카인 문성왕의 유언으로 즉위했다. 즉위 초에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자, 제방을 수리하게 하고 농사를 권장했다. 성주사 시주인 낭혜화상 무염에게 도움이 될 말을 청하여 생활과 통치의 철학으로 삼을 정도로 불교를 적극 활용했다. 또 가지산파의 개창을 후원하여 무진주 지역의 불만세력을 회유하기도 했다.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지 오래되자 861년 1월에 사위인 응렴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사망했다.
헌안왕 (憲安王)
헌안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7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857~861년이다. 문성왕 대에 상대등에 있다가 조카인 문성왕의 유언으로 즉위했다. 즉위 초에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자, 제방을 수리하게 하고 농사를 권장했다. 성주사 시주인 낭혜화상 무염에게 도움이 될 말을 청하여 생활과 통치의 철학으로 삼을 정도로 불교를 적극 활용했다. 또 가지산파의 개창을 후원하여 무진주 지역의 불만세력을 회유하기도 했다.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지 오래되자 861년 1월에 사위인 응렴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사망했다.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는 남북국시대 신라의 최치원이 찬술한 대숭복사의 연혁을 담은 비명이다. 886년(헌강왕 12) 봄에 헌강왕으로부터 작성 명령을 받아 890년(진성왕 4)에 작성 완료한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 이전에 완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문왕이 즉위 이후 원성왕을 추복하고자 하였던 의도는 물론,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이 곡사 중창과 대숭복사 개창 과정에 깊이 관여하였음을 담고 있다.
대숭복사비 (大崇福寺碑)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는 남북국시대 신라의 최치원이 찬술한 대숭복사의 연혁을 담은 비명이다. 886년(헌강왕 12) 봄에 헌강왕으로부터 작성 명령을 받아 890년(진성왕 4)에 작성 완료한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 이전에 완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문왕이 즉위 이후 원성왕을 추복하고자 하였던 의도는 물론,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이 곡사 중창과 대숭복사 개창 과정에 깊이 관여하였음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