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곽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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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때, 스승인 곽종석의 학문과 사상에 영향을 받아 성리학을 연구하며 『염와집』을 저술한 학자.
곽휘승 (郭徽承)
대한제국기 때, 스승인 곽종석의 학문과 사상에 영향을 받아 성리학을 연구하며 『염와집』을 저술한 학자.
김창숙은 조선 후기 『심산만초』, 『벽옹만초』, 『벽옹칠십삼년회상기』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1879년(고종 16)에 출생하여 1962년에 사망했다.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이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청참오적소」를 올려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하였다. 광복 이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써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저서로는 『심산유고(心山遺稿)』가 있다.
김창숙 (金昌淑)
김창숙은 조선 후기 『심산만초』, 『벽옹만초』, 『벽옹칠십삼년회상기』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1879년(고종 16)에 출생하여 1962년에 사망했다.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이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청참오적소」를 올려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하였다. 광복 이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써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저서로는 『심산유고(心山遺稿)』가 있다.
김황은 일제강점기 『쇄기』, 『효경장구』, 『사례수용』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다. 자는 이회, 호는 중재이다. 다른 이름은 김우림(金佑林)이다. 1896년(고종 33)에 출생하여 1978년 사망했다. 한주학파(寒洲學派) 곽종석의 문인이다.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김창숙을 만났다. 김창숙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면서 두 번이나 투옥되었다. 1928년 산청군 신등면에서 강학을 시작해 약 50년 동안 1천여 명의 문도를 길러냈다. 김황은 한주학파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기반으로 하는 도학을 정립하였다.
김황 (金榥)
김황은 일제강점기 『쇄기』, 『효경장구』, 『사례수용』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다. 자는 이회, 호는 중재이다. 다른 이름은 김우림(金佑林)이다. 1896년(고종 33)에 출생하여 1978년 사망했다. 한주학파(寒洲學派) 곽종석의 문인이다.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김창숙을 만났다. 김창숙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면서 두 번이나 투옥되었다. 1928년 산청군 신등면에서 강학을 시작해 약 50년 동안 1천여 명의 문도를 길러냈다. 김황은 한주학파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기반으로 하는 도학을 정립하였다.
일제강점기 『양곡유고』를 저술한 유학자.
이승복 (李承福)
일제강점기 『양곡유고』를 저술한 유학자.
대한제국기 때,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서며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학자·독립운동가.
이승희 (李承熙)
대한제국기 때,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서며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학자·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곽종석 등과 함께 파리장서사건에서 활약하였으며, 퇴계 학통의 성리설을 체계화시킨 학자·독립운동가.
송준필 (宋浚弼)
일제강점기 때, 곽종석 등과 함께 파리장서사건에서 활약하였으며, 퇴계 학통의 성리설을 체계화시킨 학자·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스승인 곽종석을 따라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독립호소문을 보내는 데 동참하였으며, 『의재문집』 등을 저술한 학자.
송호완 (宋鎬完)
일제강점기 때, 스승인 곽종석을 따라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독립호소문을 보내는 데 동참하였으며, 『의재문집』 등을 저술한 학자.
일제강점기 때, 서양의 고대철학사에 관한 『철학고변』 등을 저술한 학자.
이인재 (李寅梓)
일제강점기 때, 서양의 고대철학사에 관한 『철학고변』 등을 저술한 학자.
전우는 조선 후기 『안자편』, 『연원정종』, 『간재집』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841년(헌종 7)에 출생하여 1922년 사망하였다.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 추담(秋潭), 간재(艮齋)이다. 이재-홍직필-임헌회-전우로 이어지는 낙론 계열의 학자로 분류된다. 1908년(순종 2)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왕등도, 군산도 등으로 들어가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결심하였다. 1912년 계화도에 정착하여 계화도(繼華島: 중화를 잇는다는 뜻)라 부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
전우 (田愚)
전우는 조선 후기 『안자편』, 『연원정종』, 『간재집』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841년(헌종 7)에 출생하여 1922년 사망하였다.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 추담(秋潭), 간재(艮齋)이다. 이재-홍직필-임헌회-전우로 이어지는 낙론 계열의 학자로 분류된다. 1908년(순종 2)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왕등도, 군산도 등으로 들어가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결심하였다. 1912년 계화도에 정착하여 계화도(繼華島: 중화를 잇는다는 뜻)라 부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
장복추는 조선 후기에 유학의 전통성 유지에 힘쓴 영남 지방의 유학자로, 『태극도설문답』, 『숙흥야매잠집설』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815년 출생으로 경북 예천 출신이다. 1859년 유학의 기본 골격을 정리한 후, 앞으로의 학문 방향을 설정하였다. 1862년 민란이 발생하자 몸소 현장에 뛰어들어 난민들을 설득해 안정을 회복시켰다. 우산서원이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자 복건을 앞장서 주청하는 등 유학의 전통성 유지와 실천에 힘쓴 정통 유학자였다. 일정한 스승 없이 독학으로 공부하여 영남 유학에서 일가를 이루었고, 계속 재야에 머물며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장복추 (張福樞)
장복추는 조선 후기에 유학의 전통성 유지에 힘쓴 영남 지방의 유학자로, 『태극도설문답』, 『숙흥야매잠집설』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815년 출생으로 경북 예천 출신이다. 1859년 유학의 기본 골격을 정리한 후, 앞으로의 학문 방향을 설정하였다. 1862년 민란이 발생하자 몸소 현장에 뛰어들어 난민들을 설득해 안정을 회복시켰다. 우산서원이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자 복건을 앞장서 주청하는 등 유학의 전통성 유지와 실천에 힘쓴 정통 유학자였다. 일정한 스승 없이 독학으로 공부하여 영남 유학에서 일가를 이루었고, 계속 재야에 머물며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조선 후기에, 지평, 부교리 겸 동학교수 등을 역임하다가 국권 피탈 이후, 만국평화회의에 유림단대표로 독립청원서를 발송한 문신·독립운동가.
이만규 (李晩煃)
조선 후기에, 지평, 부교리 겸 동학교수 등을 역임하다가 국권 피탈 이후, 만국평화회의에 유림단대표로 독립청원서를 발송한 문신·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칠곡 지방의 국채보상회 회장, 제2차 유림단운동 영남대표 등을 역임하며 일제의 통치에 저항한 학자·독립운동가.
장석영 (張錫英)
일제강점기 때, 칠곡 지방의 국채보상회 회장, 제2차 유림단운동 영남대표 등을 역임하며 일제의 통치에 저항한 학자·독립운동가.
조긍섭은 근대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하며 『암서집』, 『심재집』 등을 저술한 문인·학자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근(仲謹), 호는 암서(巖棲)‧심재(深齋)이다. 근대 개항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급변한 시대의 변화와 민족의 아픔을 겪는 와중에 학자로서의 삶을 영위해 나갔으며,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 지식인들과 교유하며 활발한 문학 활동도 펼쳤다.
조긍섭 (曺兢燮)
조긍섭은 근대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하며 『암서집』, 『심재집』 등을 저술한 문인·학자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근(仲謹), 호는 암서(巖棲)‧심재(深齋)이다. 근대 개항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급변한 시대의 변화와 민족의 아픔을 겪는 와중에 학자로서의 삶을 영위해 나갔으며,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 지식인들과 교유하며 활발한 문학 활동도 펼쳤다.
조선 후기에, 『사례상변통고』, 『심동정도』, 『이기휘편』 등을 저술하였으며, 이황의 사상을 계승하고 정의한 영남학파의 중추적 학자.
이상정 (李象靖)
조선 후기에, 『사례상변통고』, 『심동정도』, 『이기휘편』 등을 저술하였으며, 이황의 사상을 계승하고 정의한 영남학파의 중추적 학자.
최익한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선인민공화국 간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897년 경북 울진 출생으로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항일운동에 가담하였고,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원으로 활약하였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서 유학 중 일월회와 조선공산당 일본부에서 활동했다.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7년간 복역 후 학문활동에 전념하였다. 해방 후 우익을 보다 넓게 포괄하려는 입장에서 민족주자연맹에 참여하였고, 1948년 월북한 후 학문연구에 몰두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학연구의 선구자로 대표적인 저술서로 『실학파와 정다산』이 있다.
최익한 (崔益翰)
최익한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선인민공화국 간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897년 경북 울진 출생으로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항일운동에 가담하였고,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원으로 활약하였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서 유학 중 일월회와 조선공산당 일본부에서 활동했다.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7년간 복역 후 학문활동에 전념하였다. 해방 후 우익을 보다 넓게 포괄하려는 입장에서 민족주자연맹에 참여하였고, 1948년 월북한 후 학문연구에 몰두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학연구의 선구자로 대표적인 저술서로 『실학파와 정다산』이 있다.
대한제국기 『주어절요』, 『도문작해』, 『동유학안』 등을 저술한 유학자.
하겸진 (河謙鎭)
대한제국기 『주어절요』, 『도문작해』, 『동유학안』 등을 저술한 유학자.
한주학파는 1870년대에 형성된 한주 이진상의 유학을 계승한 철학유파이다. 1860년 이진상이 ‘심즉리’라는 학설을 제창하였다. 허유와 곽종석 등 그의 문인이 심즉리설을 지지하면서 1878년 선석사의 학술모임을 계기로 결성되었다. 퇴계학파 내에서 이황의 학설에 정면 배치되는 학설이라고 비난하였으나 점차 경북 서남부, 경남북동부 등 퇴계학의 중심지로 확산되었다. 균형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실용학문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만국공법과 외교적 협력을 통한 독립운동을 중시하였다. 1919년에 파리 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에 가장 많이 서명한 학파이다.
한주학파 (寒洲學派)
한주학파는 1870년대에 형성된 한주 이진상의 유학을 계승한 철학유파이다. 1860년 이진상이 ‘심즉리’라는 학설을 제창하였다. 허유와 곽종석 등 그의 문인이 심즉리설을 지지하면서 1878년 선석사의 학술모임을 계기로 결성되었다. 퇴계학파 내에서 이황의 학설에 정면 배치되는 학설이라고 비난하였으나 점차 경북 서남부, 경남북동부 등 퇴계학의 중심지로 확산되었다. 균형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실용학문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만국공법과 외교적 협력을 통한 독립운동을 중시하였다. 1919년에 파리 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에 가장 많이 서명한 학파이다.
『치재집』은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유학자 조용헌(趙鏞憲, 1869~1951)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69년에 간행한 시문집이다. 6권 3책의 신연활자본으로, 표제와 권수제 모두 동일하게 ‘치재집(致齋集)’이다.
치재집 (致齋集)
『치재집』은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유학자 조용헌(趙鏞憲, 1869~1951)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69년에 간행한 시문집이다. 6권 3책의 신연활자본으로, 표제와 권수제 모두 동일하게 ‘치재집(致齋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