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학파 ()

근대사
개념
대표적인 유림인 한주 이진상의 유학을 계승한 철학유파. 한주학맥 · 이진상학맥.
이칭
이칭
한주학맥, 이진상학맥
내용 요약

한주학파는 1870년대에 형성된 한주 이진상의 유학을 계승한 철학유파이다. 1860년 이진상이 ‘심즉리’라는 학설을 제창하였다. 허유와 곽종석 등 그의 문인이 심즉리설을 지지하면서 1878년 선석사의 학술모임을 계기로 결성되었다. 퇴계학파 내에서 이황의 학설에 정면 배치되는 학설이라고 비난하였으나 점차 경북 서남부, 경남북동부 등 퇴계학의 중심지로 확산되었다. 균형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실용학문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만국공법과 외교적 협력을 통한 독립운동을 중시하였다. 1919년에 파리 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에 가장 많이 서명한 학파이다.

정의
대표적인 유림인 한주 이진상의 유학을 계승한 철학유파. 한주학맥 · 이진상학맥.
개설

1870년대부터 경북 성주를 중심으로 한 경북 남부 및 경남 산청 · 거창 · 진주 일대에서 이진상의 심즉리설(心卽理說) 및 주리론(主理論)을 지지하였고, 현실대응에 있어서도 만국공법(萬國公法)을 활용한 외교적 모색을 중시한 학파이다.

연원 및 변천

한주학파는 1870년대에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주문팔현(洲門八賢: 한주 이진상 문하의 8명의 현인)’으로 불리는 인물들이 이진상의 문인이 되었다. 1860년 이진상이 ‘심즉리(心卽理: 마음이 곧 우주의 이치이다. 『한주집(寒洲集)』 권32, 「심즉리설(心卽理說)」)’이라는 학설을 제창하였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870년 허유(許愈) · 곽종석(郭鍾錫)이, 1872년 이정모(李正模), 1875년 이두훈(李斗勳), 1876년 윤주하(尹冑夏), 1878년 장석영(張錫英) · 김진호(金鎭祜)가 이진상의 문인이 되었다. 여기에 이진상의 아들이자 문인이었던 이승희(李承熙)를 포함하면 모두 8명으로, ‘주문팔현(洲門八賢)’이 된다.

사실 18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진상의 문인들조차 심즉리설에 대해 의심을 품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허유와 곽종석에 이어, 이정모가 1874년 이진상의 심즉리를 지지함으로써 그의 학설은 점차 경북 서남부, 경남 북동부 등 퇴계학(退溪學)의 중심지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특히 한주학파의 형성에 중요한 계기가 마련된 것은 1878년의 선석사(禪石寺: 神光寺) 학술모임이었다. 1878년 8월에는 경북 성주 선석사에서 강우(江右: 서울에서 경상도를 바라볼 때 낙동강 오른쪽에 위치하는 곳을 통칭)의 뛰어난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학술모임을 가졌는데, 이 때 이진상은 장복추(張福樞)와 함께 좌장으로 참여하여 이 모임을 주도했다.

한편 1878년 윤3월에는 이진상이 자신의 이학(理學: 성리학)에 관한 견해를 총정리한 『이학종요(理學綜要)』의 집필을 끝냈다. 『이학종요』는 이진상의 학문적 견해가 집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영남학계 또는 퇴계학파의 커다란 비판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의 교감, 교정 끝에 간행된 노작(勞作)이었다. 1878년 이진상이 집필을 끝낸 후 1884년 다시 교감하였고, 1889년 문인 허유 · 이종기 · 곽종석 · 윤주하 · 장석영, 1894년 허유 · 윤주하의 교정을 거쳐, 1897년 이 책이 경상북도 고령에서 간행되었다. 이진상이 집필을 마친 후 19년 만에, 이진상이 사망한 지 11년 만에 공식 간행된 것이었다. 한편 1895년에는 이승희 · 곽종석의 주도로 이진상의 문집인 『한주집(寒洲集)』도 간행되었다.

그런데 1890년대는 이진상의 주요 저작들이 발표되어 한주학파가 학문적인 입지를 공고히 한 시기이면서 시련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했다. 심즉리설 등 예민한 학설을 담은 이진상의 저술들이 간행되자 퇴계학파 내에선 이황의 학설에 정면 배치되는 학설이라 하여 맹렬히 비난이 일었다. 또한 도산서원에 보내진 『한주집』이 1897년 모욕적인 문구와 함께 삼봉서당(三峰書堂)으로 반송되었고, 1902년 상주향교에서는 박해령(朴海齡) 등이 『한주집』을 소각한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한주학파의 학문적 위기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따라서 1890년대 중반 이후 영남학파 또는 퇴계학파 내에서 한주학파의 학설은 이단으로 이해되었고, 이진상의 문인들은 대체로 1903년경까지 외부활동을 자제하고 침잠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움직임에 변화가 생긴 것은 1903년 이진상의 고제(高弟)인 곽종석이 고종황제(이하, 고종)의 부름을 받고 상경한 일이 있은 이후였다.

1903년 음력 8월 곽종석은 고종의 부름을 받고 상경했는데, 고종은 이례적으로 곽종석의 야복(野服) 입대(入對)를 허용하였으며 의정부참찬 · 경연관 및 서연관의 높은 관직을 내림과 동시에 ‘산림(山林)’이란 호칭을 부여하며 극진히 예우하였다. 이때 곽종석은 고종에게 긴요한 사무 네 가지를 자문하고 비밀리에 차자(箚子)를 올려 국정의 난맥상과 일제의 침탈에 대응할 방책을 진술했다. 이를 계기로 곽종석을 포함한 이진상의 문인들은 외부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했고, 한주학파의 정치적, 학문적 위상은 점차 상승하였다.

나아가 1910년 국권상실 이후에도 한주학파는 학문적, 정치적으로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이승희처럼 1910년을 전후하여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서는 인물이 있었는가 하면, 곽종석 등은 1919년 3월에 있었던 유림의 대규모 독립청원운동인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내용

한주학파의 사상적 입장은 19세기의 학계 분위기 상 파격적인 학설로 받아들여진 ‘심즉리설(心卽理說)’에 집약되어 있다. 이진상은 서경덕(徐敬德) · 이황(李滉) · 이이(李珥) · 임성주(任聖周) · 기정진(奇正鎭) 등과 함께 조선 이학(理學) 6대가로 거론되는데, 그의 이학 전개는 심즉리설과 깊은 관계가 있다. 심즉리(心卽理)란, 심(心)은 곧 리(理)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퇴계학파의 시조인 이황의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과 일정한 거리가 있었고, 조선의 유림이 오래도록 이단으로 배척했던 왕수인(王守仁)의 ‘심즉리설’과도 어휘상 유사한 색채를 띠었다.

이진상이 이런 비난을 예상하면서도 심즉리설을 제창한 이유는 심즉리설을 통해 주리론(主理論)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이진상도 심(心)이 구성적인 측면에선 퇴계학파의 정설과 마찬가지로 이(理)와 기(氣)의 합체라고 이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心)은 가치의 측면에서 주(主)와 자(資)로 구분할 수 있고, 이런 구분에 따르면 리(理)가 주(主)가 되고, 기(氣)가 자(資)가 된다는 것이었다. 즉 인간의 심(心) 속에는 리(理)의 성질, 주재의 기능이 있어 이를 통해 사람의 몸을 제어한다고 보았고, 중요한 것은 심(心)에서 리(理)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진상은 심즉리설을 통해 주자학에 근거를 두되 평이하고 간명한 학설로 어려운 시대를 극복하고자 했다고 판단된다. 그는 리(理)를 밝히는 요점은 기(氣)를 항복시키는데 있다고 하고, 주기(主氣)의 학문이 학계에 만연하는 현실을 막으려고 하였다. 이진상의 심즉리설은 점차 기학(氣學)과 양학(洋學)이 만연한 시대를 치유하고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 제창된 주자성리학의 새로운 이론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한주학파는 유학, 즉 성리학(性理學)뿐만 아니라 실용학문, 구미학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서 동 시대의 다른 보수유림과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문인 곽종석은 균형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선 유학(儒學)뿐만 아니라 시대가 필요로 하는 법률 · 외교 · 물리 · 군사 · 공업 · 기술 등의 실용학문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8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조선의 국권을 보호하기 위한 방안으로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주목하였다. 이승희도 비록 전통적인 사회체제를 복구하는 데에 몰두했지만 연해주 · 만주 망명시절 이상설(李相卨)과의 만남을 통해 신학(新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한편 곽종석의 문인에 이르면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인재(李寅梓)는 지방의 선비들이 폭넓게 신학문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1912년경 고대 그리스 철학을 정리한 논문인 「철학고변(哲學攷辨)」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논문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논문으로 평가된다. 이병헌(李炳憲)은 중국의 개혁사상가 강유위(康有爲)의 변법사상을 수용하여 국내에서 공자교(孔子敎)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창숙(金昌淑)은 곽종석의 문인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인물이었는데, 1908년 대한협회(大韓協會) 성주지회의 총무로 활동하였고, 선조 김우옹(金宇顒)을 배향한 청천서원(晴川書院)을 수리해 신식학교인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세웠다.

한주학파의 시대 대응방식도 여타 보수유림과 다른 점이 많았다. 한주학파는 의병운동이나 순절투쟁과 같은 전통적인 투쟁방식보다 만국공법을 활용한 구미열강과의 공조체제를 통해 국권을 수호 · 회복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런 접근방식은 자칫 이들이 몸담고 있는 유림사회로부터 ‘이적(夷狄)’에 가까워진다는 비난을 받게 하기도 했다. 1895년 말 안동유림이 권세연(權世淵)의진을 결성했을 때 곽종석은 부장(副將)으로 임명되었으나 고사하고 참여하지 않았다. 반면 곽종석을 포함하여 윤주하 · 이승희 · 이두훈 등은 1896년 2월 상경하여 명성황후시해사건을 일으킨 일제를 규탄하고 국제법에 따라 처벌해줄 것을 요청하는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을 외국공사관에 전달하였다.

한주학파의 만국공법과 외교적 협력을 통한 독립에 대한 높은 관심은 1919년 3월에 발생한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으로 표출되었다. 파리장서운동은 국내 보수유림 137명이 파리에서 열리는 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려 했던 독립운동이었다. 이때 한주학파에서는 곽종석 · 장석영 등 41명이 독립청원서에 서명했는데(총 137명 서명), 이는 서명에 참여한 학파(학맥) 가운데 가장 많은 인원이었고, 이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한편 이들은 국내 유림뿐만 아니라 중국 주자성리학자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이들은 직접 중국의 곡부(曲阜) 등 주요 유교 유적지를 방문하는가 하면 중국학자들을 방문하거나 편지 왕래를 통해 쇠퇴하는 유교를 부흥시킬 방안을 논의하였다.

의의와 평가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보수유림(保守儒林) 내에서 구미사회에 대해 가장 개방적이었고, 영남학파 또는 퇴계학파 내에서도 안동권과 다른 독특한 학풍을 형성시킨 학파로 평가된다. 이들은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이항로(李恒老) · 기정진(奇正鎭)과 함께 주리론(主理論)을 확산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유교 또는 주리론을 수세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방식으로 보존하려 했다는 점에서 다른 학파와 차별화되었다. 특히 이들은 유교의 근본을 유지하고 보완하기 위한 차원에서 구미문명이나 정치론의 수용도 인정하였고 구미사상을 분석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유교의 부흥을 위한 방법으로 유교의 종교화를 시도한 공자교(孔子敎)운동을 벌였고,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해선 만국공법(萬國公法) 정신에 기초하여 구미열강의 협조를 이끌어 내려고 하였는데, 이는 1919년 파리장서운동으로 나타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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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권오영, 돌베개, 2003)
『儒學近百年』(금장태·고광식 공저, 박영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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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역사적 성격」(서동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한국사학전공 박사학위논문, 2009)
「19세기 강우학자들의 학문동향」(권오영, 『남명학연구』11, 2001)
「한주 이진상의 성리학 연구」(이형성,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박사학위논문, 2001)
「한주학파의 형성과 현실인식」(김도형, 『대동문화연구』 38, 2001)
「이진상의 철학사상과 그의 후예들」(홍원식, 『동양학』29, 1999)
집필자
서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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