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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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감은 고려시대 성종이 관료로 선발할 인재를 교육하기 위하여 개경에 설치한 최고 교육기관이다. 문종은 국자감을 유학부와 기술학부로 구성된 종합대학으로 만들었다. 예종이 7재를 설치하면서 유학 교육이 활성화되었고 과거와 연동되어 우수한 학생은 과거 응시에 특혜를 받았다. 인종 대에 학식을 정하였으나 그대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유학대학인 성균관과 달리 인재 교육이 유학에 제한되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었다.
국자감 (國子監)
국자감은 고려시대 성종이 관료로 선발할 인재를 교육하기 위하여 개경에 설치한 최고 교육기관이다. 문종은 국자감을 유학부와 기술학부로 구성된 종합대학으로 만들었다. 예종이 7재를 설치하면서 유학 교육이 활성화되었고 과거와 연동되어 우수한 학생은 과거 응시에 특혜를 받았다. 인종 대에 학식을 정하였으나 그대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유학대학인 성균관과 달리 인재 교육이 유학에 제한되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었다.
고려 후기에, 국학학정, 사헌규정 등을 역임한 문신.
김문정 (金文鼎)
고려 후기에, 국학학정, 사헌규정 등을 역임한 문신.
백문절은 고려 후기에 국자좨주, 보문각학사, 국학대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로 주로 문장과 함께 절개를 가지고 활약한 인물이다. 벼슬은 한림원에서 시작하여 주로 문한직을 역임하였다. 특히 원종 폐위 사건에서 자신의 뜻을 국왕에게 관철하여 표문을 작성하였다. 이후 낭사 관리들과 함께 권세가 자제 임용에 반대하였다가 파면되기도 하였다. 또한 왕의 노여움으로 감옥에 갔던 심양 등을 석방하게 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백문절 (白文節)
백문절은 고려 후기에 국자좨주, 보문각학사, 국학대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로 주로 문장과 함께 절개를 가지고 활약한 인물이다. 벼슬은 한림원에서 시작하여 주로 문한직을 역임하였다. 특히 원종 폐위 사건에서 자신의 뜻을 국왕에게 관철하여 표문을 작성하였다. 이후 낭사 관리들과 함께 권세가 자제 임용에 반대하였다가 파면되기도 하였다. 또한 왕의 노여움으로 감옥에 갔던 심양 등을 석방하게 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는 통일신라시대 788년(원성왕 4)부터 시행된 관인 선발 제도이다.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라고도 부르며, 유교 교육 기관인 국학과 일정한 관련성이 있는 제도로 여겨진다. 기존에 관인을 뽑을 때 화랑도 활동에서 특출한 사람이나 활쏘기와 같은 재주가 있는 사람을 선발하였으나, 독서삼품과를 시행함으로써 시험을 통해 한학적 소양을 갖춘 인물을 관리로 선발하게 되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과거제 내지 과거의 시원적 형태로 이해되고 있으나, 신라 골품제 사회에서 주된 관리 등용 방법으로 시행되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독서삼품과 (讀書三品科)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는 통일신라시대 788년(원성왕 4)부터 시행된 관인 선발 제도이다.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라고도 부르며, 유교 교육 기관인 국학과 일정한 관련성이 있는 제도로 여겨진다. 기존에 관인을 뽑을 때 화랑도 활동에서 특출한 사람이나 활쏘기와 같은 재주가 있는 사람을 선발하였으나, 독서삼품과를 시행함으로써 시험을 통해 한학적 소양을 갖춘 인물을 관리로 선발하게 되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과거제 내지 과거의 시원적 형태로 이해되고 있으나, 신라 골품제 사회에서 주된 관리 등용 방법으로 시행되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숙위학생은 통일신라 때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익히게 하려고 당나라 국자감에 파견한 유학생이다. 유학승(留學僧)과 함께 신라 대당 외교의 상징이다. 이들은 당 중심의 국제 질서를 인용하면서, 인적 · 물적 교류를 활발히 전개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신라 고유 문화와 제도를 당은 물론 주변 국가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다만, 신라 골품제 사회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능력과 경험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국가에서 발휘하게 되었다.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 견당유학생(遣唐留學生)이라고도 한다.
숙위학생 (宿衛學生)
숙위학생은 통일신라 때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익히게 하려고 당나라 국자감에 파견한 유학생이다. 유학승(留學僧)과 함께 신라 대당 외교의 상징이다. 이들은 당 중심의 국제 질서를 인용하면서, 인적 · 물적 교류를 활발히 전개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신라 고유 문화와 제도를 당은 물론 주변 국가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다만, 신라 골품제 사회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능력과 경험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국가에서 발휘하게 되었다.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 견당유학생(遣唐留學生)이라고도 한다.
서학은 통일신라시기에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선진학술과 사상을 배우고 익히던 행위이다. 서학이라는 용어는 신라 하대에 최치원이 처음 사용했으며 ‘서(西)’는 중국을 가리킨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나 송나라로 신라 하대에는 서학이 크게 유행하였다. 서학활동은 선종을 공부하려는 구법승과 골품제로 사회적 진출에 제약을 받던 6두품 출신의 도당유학생이 많았다. 신라는 서학을 통해 음양학·병법·기술학 등을 익혔다. 신라의 정치·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신라의 문화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어 하나의 체계적인 학문분야로 성립하지는 못하였다.
서학 (西學)
서학은 통일신라시기에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선진학술과 사상을 배우고 익히던 행위이다. 서학이라는 용어는 신라 하대에 최치원이 처음 사용했으며 ‘서(西)’는 중국을 가리킨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나 송나라로 신라 하대에는 서학이 크게 유행하였다. 서학활동은 선종을 공부하려는 구법승과 골품제로 사회적 진출에 제약을 받던 6두품 출신의 도당유학생이 많았다. 신라는 서학을 통해 음양학·병법·기술학 등을 익혔다. 신라의 정치·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신라의 문화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어 하나의 체계적인 학문분야로 성립하지는 못하였다.
예종은 고려 전기 제1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105~1122년이며, 숙종의 맏아들이다.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여진정벌에 힘썼다. 윤관·오연총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쳐서 대파하게 하고, 정복 지역에 구성을 설치했다가 1년 만에 구성을 철폐하고 여진족에게 돌려주었다. 이후 여진의 금나라, 거란의 요나라 사이에서는 대체로 중립 외교를 펼쳤다. 국학에 학과별 전문 강좌인 칠재를 설치하고 양현고라는 장학재단을 두었으며, 이름난 선비를 뽑아 학관으로 삼아 가르치게 하여 유학을 크게 일으켰다. 송의 궁중에서 쓰던 대성악을 들여왔다.
예종 (睿宗)
예종은 고려 전기 제1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105~1122년이며, 숙종의 맏아들이다.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여진정벌에 힘썼다. 윤관·오연총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쳐서 대파하게 하고, 정복 지역에 구성을 설치했다가 1년 만에 구성을 철폐하고 여진족에게 돌려주었다. 이후 여진의 금나라, 거란의 요나라 사이에서는 대체로 중립 외교를 펼쳤다. 국학에 학과별 전문 강좌인 칠재를 설치하고 양현고라는 장학재단을 두었으며, 이름난 선비를 뽑아 학관으로 삼아 가르치게 하여 유학을 크게 일으켰다. 송의 궁중에서 쓰던 대성악을 들여왔다.
고려·조선시대 국학생에게 보인 승급시험.
승보시 (陞補試)
고려·조선시대 국학생에게 보인 승급시험.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해 이를 후손에게 계승하기 위한 목적으로 1957년 5월 14일에 설립된 공익 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世宗大王紀念事業會)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해 이를 후손에게 계승하기 위한 목적으로 1957년 5월 14일에 설립된 공익 법인.
선종은 고려 전기 제13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83~1094년. 문종의 아들로 형인 순종이 즉위 두 달 만에 죽자 즉위하였다. 승과를 설치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아우 의천이 송에서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와 불경과 경서 1천 권을 바치고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세울 것을 건의하자, 송·요·일본 등지에서 사들인 서적 4천여 권을 모두 간행하게 했다. 예부의 건의로 국학에 공자의 제자 72현의 상을 그려 벽에 붙이기도 하였다. 경사에 밝고 제술에 뛰어났으나 놀이에 절도가 없고 사탑 건립에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원망이 많았다고 한다.
선종 (宣宗)
선종은 고려 전기 제13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83~1094년. 문종의 아들로 형인 순종이 즉위 두 달 만에 죽자 즉위하였다. 승과를 설치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아우 의천이 송에서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와 불경과 경서 1천 권을 바치고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세울 것을 건의하자, 송·요·일본 등지에서 사들인 서적 4천여 권을 모두 간행하게 했다. 예부의 건의로 국학에 공자의 제자 72현의 상을 그려 벽에 붙이기도 하였다. 경사에 밝고 제술에 뛰어났으나 놀이에 절도가 없고 사탑 건립에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원망이 많았다고 한다.
신돈은 고려 후기 공민왕 대 개혁정치를 추진한 승려이다. 신돈에 대해서는 『고려사』 등에서 요승(妖僧), 사승(邪僧), 용승(庸僧), 미승(微僧), 노호(老狐) 등으로 지칭하는 부정적 평가도 있으나, 개혁가로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전민변정 사업을 추진하여 토지와 예속민 문제를 해결하고 국학 중흥책을 실시한 점, 산관의 통제와 순자격제의 시행으로 관리 기강을 확립한 점 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신돈 (辛旽)
신돈은 고려 후기 공민왕 대 개혁정치를 추진한 승려이다. 신돈에 대해서는 『고려사』 등에서 요승(妖僧), 사승(邪僧), 용승(庸僧), 미승(微僧), 노호(老狐) 등으로 지칭하는 부정적 평가도 있으나, 개혁가로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전민변정 사업을 추진하여 토지와 예속민 문제를 해결하고 국학 중흥책을 실시한 점, 산관의 통제와 순자격제의 시행으로 관리 기강을 확립한 점 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신라시대의 관서.
예부 (禮部)
신라시대의 관서.
재령이씨 영해파 종가 고문서는 재령 이씨 영해파 종가에 소장된 고문서로 종가 유물이다. 모두 12종 394점으로, 1493년(성종 24) 영해파 시조 이애(李璦)의 형제 자매간에 분급(分給)된 분재기(分財記)를 비롯해 1900년대 초기까지 전래된 고문서이다. 173점의 명문은 1532년(중종 27)에서 1919년까지 작성되어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토지 제도의 제반 양상을 규명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외에 호적단자, 소지, 예장지, 시권, 통문, 완문, 완의, 입의문 등이 남아 있어서 재령 이씨 영해파 종손가의 가계·족벌·경제·노비 상황 등을 살필 수 있다.
재령이씨 영해파 종가 고문서 (載寧李氏 寧海派 宗家 古文書)
재령이씨 영해파 종가 고문서는 재령 이씨 영해파 종가에 소장된 고문서로 종가 유물이다. 모두 12종 394점으로, 1493년(성종 24) 영해파 시조 이애(李璦)의 형제 자매간에 분급(分給)된 분재기(分財記)를 비롯해 1900년대 초기까지 전래된 고문서이다. 173점의 명문은 1532년(중종 27)에서 1919년까지 작성되어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토지 제도의 제반 양상을 규명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외에 호적단자, 소지, 예장지, 시권, 통문, 완문, 완의, 입의문 등이 남아 있어서 재령 이씨 영해파 종손가의 가계·족벌·경제·노비 상황 등을 살필 수 있다.
조선시대 의병장 이탁영이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그날그날 보고 들은 사건을 기록한 일기.
이탁영 정만록 (李擢英 征蠻錄)
조선시대 의병장 이탁영이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그날그날 보고 들은 사건을 기록한 일기.
칠재는 1109년(예종 4) 7월 국학 교육(國學敎育)의 진흥을 목적으로 국자감(國子監) 내에 설치한 전문 학제이다. 예종이 국학의 진흥을 위해 문무(文武) 양학의 주요 과목을 독립 강좌로 설치해 기존 국학과 별도로 선발한 학생들로 하여금 수학하게 한 학제이다. 특히 여진의 부상에 대응하여 무학을 가르치는 강예재를 설치하였다.
칠재 (七齋)
칠재는 1109년(예종 4) 7월 국학 교육(國學敎育)의 진흥을 목적으로 국자감(國子監) 내에 설치한 전문 학제이다. 예종이 국학의 진흥을 위해 문무(文武) 양학의 주요 과목을 독립 강좌로 설치해 기존 국학과 별도로 선발한 학생들로 하여금 수학하게 한 학제이다. 특히 여진의 부상에 대응하여 무학을 가르치는 강예재를 설치하였다.
신라시대의 관직.
조교 (助敎)
신라시대의 관직.
해방 이후 『강화학 최후의 광경』, 『사천강단』, 『예루살렘 입성기』 등을 저술한 학자. 역사학자.
민영규 (閔泳珪)
해방 이후 『강화학 최후의 광경』, 『사천강단』, 『예루살렘 입성기』 등을 저술한 학자. 역사학자.
한국화는 한국의 전통적 재료와 양식 및 기법을 따르는 동양화이다. 서양화와 구분을 위해 사용하던 동양화라는 명칭을 주체적 입장에서 개칭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한국화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1983년 개정된 미술교과서에서부터이다. 명칭의 변화에 수반하여 주체적인 문화 역량 창출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모색은 2, 30대 청년작가 중심의 수묵화 운동 및 수묵 개념의 변화를 이끌었다. 또 민화·고구려 고분벽화·불화 등에 대한 관심의 고조, 채색화의 융성으로 이어졌다. 한편 이 용어 사용에 대한 비판도 서양화단을 중심으로 제기된 바 있다.
한국화 (韓國畵)
한국화는 한국의 전통적 재료와 양식 및 기법을 따르는 동양화이다. 서양화와 구분을 위해 사용하던 동양화라는 명칭을 주체적 입장에서 개칭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한국화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1983년 개정된 미술교과서에서부터이다. 명칭의 변화에 수반하여 주체적인 문화 역량 창출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모색은 2, 30대 청년작가 중심의 수묵화 운동 및 수묵 개념의 변화를 이끌었다. 또 민화·고구려 고분벽화·불화 등에 대한 관심의 고조, 채색화의 융성으로 이어졌다. 한편 이 용어 사용에 대한 비판도 서양화단을 중심으로 제기된 바 있다.
헌강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875~886년이며 아버지 경문왕을 이어 즉위했다. 부왕 때부터 시작된 국학 진흥활동에 박차를 가해 국학에 적극적이던 6두품 신분층의 정치적 성장이 이루어졌고 이들이 국왕의 지지세력으로 활약했다.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도 도모하여 황룡사에 백고좌강경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듣는 등 불교진흥에도 힘썼다. 백성들의 지붕은 기와로 이어졌고, 밥할 때 숯을 때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신라 최전성기의 왕으로, 당나라와 일본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헌강왕 (憲康王)
헌강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875~886년이며 아버지 경문왕을 이어 즉위했다. 부왕 때부터 시작된 국학 진흥활동에 박차를 가해 국학에 적극적이던 6두품 신분층의 정치적 성장이 이루어졌고 이들이 국왕의 지지세력으로 활약했다.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도 도모하여 황룡사에 백고좌강경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듣는 등 불교진흥에도 힘썼다. 백성들의 지붕은 기와로 이어졌고, 밥할 때 숯을 때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신라 최전성기의 왕으로, 당나라와 일본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전두환 정부가 민족문화의 계승과 대학생들의 국학에 대한 관심 고취라는 명분 아래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주최한 관제적 성격의 문화축제.
국풍81 (國風81)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전두환 정부가 민족문화의 계승과 대학생들의 국학에 대한 관심 고취라는 명분 아래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주최한 관제적 성격의 문화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