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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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은 1907년 7월 24일,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하기 위해 체결한 불평등조약이다. 전체 7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이 조약으로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의 시정을 개선한다는 명목하에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 등 일체의 사무에 대해 승인권을 장악함으로써 입법, 사법 및 고등 관리의 임면 등 대한제국의 내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한일신협약 (韓日新協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은 1907년 7월 24일,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하기 위해 체결한 불평등조약이다. 전체 7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이 조약으로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의 시정을 개선한다는 명목하에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 등 일체의 사무에 대해 승인권을 장악함으로써 입법, 사법 및 고등 관리의 임면 등 대한제국의 내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별기군은 1881년(고종 18)에 설치된 신식 군대이다.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신식 군사연습을 실시하는 계획을 세웠다. 오군문(五軍門)에서 신체가 강건한 지원자 80여 명을 특별히 선발하여 무위영(武衛營)에 소속시켜 창설하여 별기군 또는 별기대(別技隊)라고 불렀다. 군사훈련을 담당할 교사로 일본 육군병학교 출신 호리모도를 임명하여 왜별기(倭別技)라고도 불렀다.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구식 군대의 습격을 받았고, 일본인 교관이 살해되었다. 새로운 군사 개혁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옛 군영체제로 바뀌면서 해체되고 오군문의 본대로 되돌아갔다.
별기군 (別技軍)
별기군은 1881년(고종 18)에 설치된 신식 군대이다.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신식 군사연습을 실시하는 계획을 세웠다. 오군문(五軍門)에서 신체가 강건한 지원자 80여 명을 특별히 선발하여 무위영(武衛營)에 소속시켜 창설하여 별기군 또는 별기대(別技隊)라고 불렀다. 군사훈련을 담당할 교사로 일본 육군병학교 출신 호리모도를 임명하여 왜별기(倭別技)라고도 불렀다.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구식 군대의 습격을 받았고, 일본인 교관이 살해되었다. 새로운 군사 개혁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옛 군영체제로 바뀌면서 해체되고 오군문의 본대로 되돌아갔다.
사병은 국가의 공적(公的)인 군제(軍制)에 포함되지 않고, 특정한 개인 또는 집단에 사적(私的)으로 예속되어 있는 무력집단이다. 족병(族兵)·가병(家兵) 등으로도 불리며, 주로 가노(家奴)나 유민(流民)로 구성되었다. 9세기 말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각지의 호족들이 유민들을 모아 조직하였다. 고려 정부는 중앙집권화정책을 추진하여 호족들의 사병을 해체하였는데, 무신란 이후 무신들이 다시 사병을 양성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에 의흥삼군부를 설치하여 사병을 혁파하고자 하였으나 제2차 왕자의 난 이후에 이방원에 의해 혁파되었다.
사병 (私兵)
사병은 국가의 공적(公的)인 군제(軍制)에 포함되지 않고, 특정한 개인 또는 집단에 사적(私的)으로 예속되어 있는 무력집단이다. 족병(族兵)·가병(家兵) 등으로도 불리며, 주로 가노(家奴)나 유민(流民)로 구성되었다. 9세기 말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각지의 호족들이 유민들을 모아 조직하였다. 고려 정부는 중앙집권화정책을 추진하여 호족들의 사병을 해체하였는데, 무신란 이후 무신들이 다시 사병을 양성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에 의흥삼군부를 설치하여 사병을 혁파하고자 하였으나 제2차 왕자의 난 이후에 이방원에 의해 혁파되었다.
1888년(고종 25)에 설치된 사관양성학교.
연무공원 (鍊武公院)
1888년(고종 25)에 설치된 사관양성학교.
신라시대의 군부대.
시위부 (侍衛府)
신라시대의 군부대.
혈성단(血誠團)은 1920년 러시아 연해주(沿海州) 추풍(秋風)에서 조직된 항일무장단체이다. 강국모(姜國模), 김종화(金鍾和) 등이 서간도(西間島)에서 이동해 온 독립단(獨立團) 부대원들을 기반으로 설립하였다. 채영(蔡英)을 사령관으로 추대하여 1920년 6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20년 10월 아누치노로 이동해 수청(水淸) 군대, 신민단(新民團) 부대와 통합하였으나, 1921년 가을 다시 추풍으로 돌아갔다.
혈성단 (血誠團)
혈성단(血誠團)은 1920년 러시아 연해주(沿海州) 추풍(秋風)에서 조직된 항일무장단체이다. 강국모(姜國模), 김종화(金鍾和) 등이 서간도(西間島)에서 이동해 온 독립단(獨立團) 부대원들을 기반으로 설립하였다. 채영(蔡英)을 사령관으로 추대하여 1920년 6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20년 10월 아누치노로 이동해 수청(水淸) 군대, 신민단(新民團) 부대와 통합하였으나, 1921년 가을 다시 추풍으로 돌아갔다.
고려시대 군대편성상의 단위.
군호 (軍戶)
고려시대 군대편성상의 단위.
부인은 전통 시대 왕의 배우자 및 외명부(外命婦)의 칭호이다. 중국식 부인 칭호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마립간 시기부터였다. 왕비에 대한 부인 칭호의 사용은 고려에도 이어졌다. 고려에서 부인은 주로 궁부인·원부인의 형태로 사용되다가, 궁주·원주 칭호의 등장으로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조선에서는 내명부(內命婦)의 칭호로 쓰이지 않게 되었다. 부인이 외명부로서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고려부터였다. 외명부 제도가 더욱 정비된 조선에 이르면, 부인 칭호는 종친과 문무 관인의 처를 나누어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부인 (夫人)
부인은 전통 시대 왕의 배우자 및 외명부(外命婦)의 칭호이다. 중국식 부인 칭호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마립간 시기부터였다. 왕비에 대한 부인 칭호의 사용은 고려에도 이어졌다. 고려에서 부인은 주로 궁부인·원부인의 형태로 사용되다가, 궁주·원주 칭호의 등장으로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조선에서는 내명부(內命婦)의 칭호로 쓰이지 않게 되었다. 부인이 외명부로서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고려부터였다. 외명부 제도가 더욱 정비된 조선에 이르면, 부인 칭호는 종친과 문무 관인의 처를 나누어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권종해는 강원도 인제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주요 무장투쟁 활동은 1907년부터 19010년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진 시기이지만, 그 후에도 무장투쟁을 계속 시도하였다. 유림 출신으로, 아버지 권인규는 동학농민운동 때 민보군으로 활약하였고, 을미의병 때 봉기하였다. 아들인 권기수는 3·1운동 때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권종해 (權鍾海)
권종해는 강원도 인제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주요 무장투쟁 활동은 1907년부터 19010년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진 시기이지만, 그 후에도 무장투쟁을 계속 시도하였다. 유림 출신으로, 아버지 권인규는 동학농민운동 때 민보군으로 활약하였고, 을미의병 때 봉기하였다. 아들인 권기수는 3·1운동 때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한상렬은 1907년 강원도 횡성과 홍천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민긍호 사후에 약화되는 원주 일대의 의병 전쟁을 이끌었으며, 국내에서 의병 항쟁이 어려워지자 의병 부대를 해산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범윤·유인석 등이 조직한 성명회, 대한의용부, 대한독립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김좌진이 설립한 성동무관학교 내의 조직인 동우회와 중동선(中東線) 대표로 북만주 의용군에 참여하는 등 무장 독립투쟁을 지속하였다.
한상렬 (韓相烈)
한상렬은 1907년 강원도 횡성과 홍천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민긍호 사후에 약화되는 원주 일대의 의병 전쟁을 이끌었으며, 국내에서 의병 항쟁이 어려워지자 의병 부대를 해산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범윤·유인석 등이 조직한 성명회, 대한의용부, 대한독립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김좌진이 설립한 성동무관학교 내의 조직인 동우회와 중동선(中東線) 대표로 북만주 의용군에 참여하는 등 무장 독립투쟁을 지속하였다.
고려전기 제6대 성종의 제3왕비.
연창궁부인 (延昌宮夫人)
고려전기 제6대 성종의 제3왕비.
홍성원(洪盛原)이 지은 장편소설.
디데이의 병촌 (D-Day의 兵村)
홍성원(洪盛原)이 지은 장편소설.
고려 전기의 군사 조직.
우천군 (祐天軍)
고려 전기의 군사 조직.
북한 황해남도 안악군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도시터. 도시유적.
당장경 유적 (唐藏京 遺蹟)
북한 황해남도 안악군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도시터. 도시유적.
신라시대의 군영.
우곡정 (雨谷停)
신라시대의 군영.
고려 때에 종실의 여자에게 주던 작호의 하나.
군군 (郡君)
고려 때에 종실의 여자에게 주던 작호의 하나.
군가는 노랫말을 갖춘 군대음악으로 투철한 국가관과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전사(戰士)들의 전의고양과 단결심 함양을 위해 부르도록 지어진 노래이다. 대부분 국가에서는 민요와 유사한 국민 음악적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미국, 중국, 프랑스 등 많은 나라에서는 기존 군가를 국가(國歌)로 선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우리 군가의 노랫말은 ‘조국’, ‘충무’, ‘화랑’, ‘백두’, ‘전선’, ‘승리’, '전우' 등 장병의 정신전력을 고취시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된 주제어는 ‘정의’, ‘자유’, ‘평화’로 요약될 수 있다.
군가 (軍歌)
군가는 노랫말을 갖춘 군대음악으로 투철한 국가관과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전사(戰士)들의 전의고양과 단결심 함양을 위해 부르도록 지어진 노래이다. 대부분 국가에서는 민요와 유사한 국민 음악적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미국, 중국, 프랑스 등 많은 나라에서는 기존 군가를 국가(國歌)로 선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우리 군가의 노랫말은 ‘조국’, ‘충무’, ‘화랑’, ‘백두’, ‘전선’, ‘승리’, '전우' 등 장병의 정신전력을 고취시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된 주제어는 ‘정의’, ‘자유’, ‘평화’로 요약될 수 있다.
군악대는 1895년부터 1907년까지 군영에서 음악을 연주한 악대이다. 먼저 전통 취타를 연주하던 내취군악대가 있었고 이후 서양식 악기를 쓰는 양악군악대가 만들어졌다. 양악군악대가 생기기 전에는 나팔을 부는 곡호수, 나팔과 북으로 구성된 곡호대가 활동했다. 1900년 정식으로 양악군악대가 조직되며 서양식 편성으로 운영되었고, 독일인 에케르트 등이 훈련을 지도했다. 그러나 1907년 군대 해산으로 군악대가 폐지되었고, 해방 이후 다시 육군·해군·공군 군악대가 창설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군악대 (軍樂隊)
군악대는 1895년부터 1907년까지 군영에서 음악을 연주한 악대이다. 먼저 전통 취타를 연주하던 내취군악대가 있었고 이후 서양식 악기를 쓰는 양악군악대가 만들어졌다. 양악군악대가 생기기 전에는 나팔을 부는 곡호수, 나팔과 북으로 구성된 곡호대가 활동했다. 1900년 정식으로 양악군악대가 조직되며 서양식 편성으로 운영되었고, 독일인 에케르트 등이 훈련을 지도했다. 그러나 1907년 군대 해산으로 군악대가 폐지되었고, 해방 이후 다시 육군·해군·공군 군악대가 창설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군형법」은 군사 범죄와 형벌에 관하여 정하고 있는 특별형법이다. 특별형법으로서의 「군형법」도 법률로 달리 정하지 않는 한 일반형법에서 규정한 총칙이 그대로 적용되고[「형법」 제8조], 헌법상의 원칙인 죄형법정주의의 지배를 받는다. 「군형법」은 일반 사회에서는 범죄로 다룰 필요가 없으나 군 특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범죄로 정한 특수한 형태의 구성요건들이 규정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범죄의 유형으로는 반란의 죄, 이적의 죄, 지휘권 남용의 죄, 지휘관의 항복과 도피의 죄, 수소이탈의 죄, 군무이탈의 죄 등이 있다.
군형법 (軍刑法)
「군형법」은 군사 범죄와 형벌에 관하여 정하고 있는 특별형법이다. 특별형법으로서의 「군형법」도 법률로 달리 정하지 않는 한 일반형법에서 규정한 총칙이 그대로 적용되고[「형법」 제8조], 헌법상의 원칙인 죄형법정주의의 지배를 받는다. 「군형법」은 일반 사회에서는 범죄로 다룰 필요가 없으나 군 특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범죄로 정한 특수한 형태의 구성요건들이 규정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범죄의 유형으로는 반란의 죄, 이적의 죄, 지휘권 남용의 죄, 지휘관의 항복과 도피의 죄, 수소이탈의 죄, 군무이탈의 죄 등이 있다.
왕무숭은 고려 전기 문종 때 어사대부, 동북면행영병마사, 판상서형부사,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의 딸은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이예와 혼인하여 선종의 후비 정신현비 이씨를 낳고 정신현비가 다시 예종의 후비 경화왕후 이씨를 낳음으로써 상당군대부인에 봉해졌다. 그러나 왕무숭은 교위 거신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아들 왕정과 함께 안동으로 쫓겨났다.
왕무숭 (王懋崇)
왕무숭은 고려 전기 문종 때 어사대부, 동북면행영병마사, 판상서형부사,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의 딸은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이예와 혼인하여 선종의 후비 정신현비 이씨를 낳고 정신현비가 다시 예종의 후비 경화왕후 이씨를 낳음으로써 상당군대부인에 봉해졌다. 그러나 왕무숭은 교위 거신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아들 왕정과 함께 안동으로 쫓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