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동아일보"
검색결과 총 23건
변영만은 일제강점기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8·15광복 이후 광주지방법원 판사, 변호사, 성균관대학교 교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관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자 학자이다. 일제강점기에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각종 시국 사건의 변호인단으로 참여하였고, 1923년 최남선이 창간한 『동명(東明)』지에 많은 기고를 하였다. 1930년대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양대 일간지에 시론, 시조와 시들을 발표하였다. 1954년 65세로 사망하였다.
변영만 (卞榮晩)
변영만은 일제강점기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8·15광복 이후 광주지방법원 판사, 변호사, 성균관대학교 교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관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자 학자이다. 일제강점기에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각종 시국 사건의 변호인단으로 참여하였고, 1923년 최남선이 창간한 『동명(東明)』지에 많은 기고를 하였다. 1930년대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양대 일간지에 시론, 시조와 시들을 발표하였다. 1954년 65세로 사망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무산자동맹, 화요회, 조선노농총맹, 조선공산당 등에서 활동한 공산주의자.
박일병 (朴一秉)
일제강점기 때, 무산자동맹, 화요회, 조선노농총맹, 조선공산당 등에서 활동한 공산주의자.
김명식은 일제강점기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하며 유학생 운동에 참가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 주필과 논설반원으로 활약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다가 신생활사 필화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20~1930년대 사회운동, 한국사, 문예운동 등에 관한 논설을 다수 발표하였다. 1928~1936년 일본 오사카에 체류하며 재일조선인 운동에 관여하였다. 중일전쟁기에는 일본의 정책에 기대를 걸고 조선의 지위 향상을 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김명식 (金明植)
김명식은 일제강점기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하며 유학생 운동에 참가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 주필과 논설반원으로 활약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다가 신생활사 필화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20~1930년대 사회운동, 한국사, 문예운동 등에 관한 논설을 다수 발표하였다. 1928~1936년 일본 오사카에 체류하며 재일조선인 운동에 관여하였다. 중일전쟁기에는 일본의 정책에 기대를 걸고 조선의 지위 향상을 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송진우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역임한 언론인, 정치인,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전남 담양 출생으로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환 후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1921년 동아일보 3대 사장에 취임한 뒤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를 위한 브나로드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1934년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지지하였다. 1936년 8월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건으로 사임하였다. 광복 후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였고 한국민주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수석총무에 추대되었다.
송진우 (宋鎭禹)
송진우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역임한 언론인, 정치인,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전남 담양 출생으로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환 후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1921년 동아일보 3대 사장에 취임한 뒤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를 위한 브나로드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1934년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지지하였다. 1936년 8월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건으로 사임하였다. 광복 후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였고 한국민주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수석총무에 추대되었다.
최두선은 해방 이후 민주국민당 부위원장,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언론인, 교육자이다. 1894년 서울 출생으로 육당 최남선의 동생이다. 1917년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 졸업 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이 되었고, 조선어연구회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독일 유학 후 귀국해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으로 복임했다. 1947년 동아일보사 사장, 1953년 민주국민당 부위원장, 1963년 제3공화국 초대 내각의 총리로 활동했다. 1963년 고려대학교와 1968년 와세다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72년 국민훈장무궁화장을 수여 받았다.
최두선 (崔斗善)
최두선은 해방 이후 민주국민당 부위원장,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언론인, 교육자이다. 1894년 서울 출생으로 육당 최남선의 동생이다. 1917년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 졸업 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이 되었고, 조선어연구회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독일 유학 후 귀국해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으로 복임했다. 1947년 동아일보사 사장, 1953년 민주국민당 부위원장, 1963년 제3공화국 초대 내각의 총리로 활동했다. 1963년 고려대학교와 1968년 와세다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72년 국민훈장무궁화장을 수여 받았다.
최상현은 일제강점기, 감리교회 목사이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Christian Church)의 1세대 지도자이다. 주로 종로 기독교 청년회와 여러 감리교회에서 설교하였으며, 『동아일보』와 감리교 협성신학교의 학술지인 『신학세계』에 글을 기고하였다. 1937년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還元運動)을 전개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교단을 옮겨 돈암정 교회를 개척하는 등 그리스도의 교회 1세대 목회자로 활약하였다. 1945년 광복 후 미군정청 아놀드 장관의 고문직을 맡기도 했으며,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최상현 (崔相鉉)
최상현은 일제강점기, 감리교회 목사이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Christian Church)의 1세대 지도자이다. 주로 종로 기독교 청년회와 여러 감리교회에서 설교하였으며, 『동아일보』와 감리교 협성신학교의 학술지인 『신학세계』에 글을 기고하였다. 1937년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還元運動)을 전개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교단을 옮겨 돈암정 교회를 개척하는 등 그리스도의 교회 1세대 목회자로 활약하였다. 1945년 광복 후 미군정청 아놀드 장관의 고문직을 맡기도 했으며,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천관우는 해방 이후 조선일보 논설위원, 동아일보 주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으로 역사학자이다. 1925년에 태어나 1991년에 사망했다. 1944년 경성제대에 입학하여 한국사를 전공하였다. 1951년 대한통신 기자로 언론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한국일보와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편집국장과 주필 등을 역임하였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의 공동대표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주력하였다. 유신체제하에서 한국사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여 고조선과 삼한, 가야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 연구에 기여하였다.
천관우 (千寬宇)
천관우는 해방 이후 조선일보 논설위원, 동아일보 주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으로 역사학자이다. 1925년에 태어나 1991년에 사망했다. 1944년 경성제대에 입학하여 한국사를 전공하였다. 1951년 대한통신 기자로 언론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한국일보와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편집국장과 주필 등을 역임하였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의 공동대표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주력하였다. 유신체제하에서 한국사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여 고조선과 삼한, 가야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 연구에 기여하였다.
장덕수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부사장,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자 정치인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4년(고종 31)에 태어나 1947년에 사망했다. 일본 유학 후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을 결성했고, 『동아일보』 창간 후 초대 주필과 부사장이 되었다. 미국에 재차 유학하여 이승만 지지 활동을 하다 귀국했다. 이후 일제가 사상전향 공작을 위해 조직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간부로서 『사상보국』의 발간을 주도했고, 침략전쟁 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를 역임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우파 이론가로 활동하다 암살당했다.
장덕수 (張德秀)
장덕수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부사장,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자 정치인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4년(고종 31)에 태어나 1947년에 사망했다. 일본 유학 후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을 결성했고, 『동아일보』 창간 후 초대 주필과 부사장이 되었다. 미국에 재차 유학하여 이승만 지지 활동을 하다 귀국했다. 이후 일제가 사상전향 공작을 위해 조직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간부로서 『사상보국』의 발간을 주도했고, 침략전쟁 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를 역임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우파 이론가로 활동하다 암살당했다.
장덕준은 일제강점기 경신참변 취재 중 실종된 동아일보 기자이다.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동아일보 창간을 주도하고 특파원 등으로 활동하던 중 1920년 경신참변을 취재하다가 실종되었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1957년 종군기자이자 순직기자로 인정하였다.
장덕준 (張德俊)
장덕준은 일제강점기 경신참변 취재 중 실종된 동아일보 기자이다.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동아일보 창간을 주도하고 특파원 등으로 활동하던 중 1920년 경신참변을 취재하다가 실종되었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1957년 종군기자이자 순직기자로 인정하였다.
진학문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기, 『요조한〔四畳半〕』, 『홍루(紅淚)』 등을 번역한 소설가이자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20년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정치경제부장, 1924년 『시대일보』 편집인 겸 발행인을 지냈고, 1937년 만주국 내무국 참사관과 1945년 중추원참의로 임명되었으며, 8‧15광복 이후 경제계에 투신하여 1963년부터 한국경제인연합회 상임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진학문 (秦學文)
진학문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기, 『요조한〔四畳半〕』, 『홍루(紅淚)』 등을 번역한 소설가이자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20년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정치경제부장, 1924년 『시대일보』 편집인 겸 발행인을 지냈고, 1937년 만주국 내무국 참사관과 1945년 중추원참의로 임명되었으며, 8‧15광복 이후 경제계에 투신하여 1963년부터 한국경제인연합회 상임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조선음악협회 인천지부 주최로 1929년 1월 12일∼13일에 인천시에서 개최되었던 명창들의 예술공연. 국악연주회.
경인연합 명창음악연주회 (京仁聯合名 唱音樂演奏會)
조선음악협회 인천지부 주최로 1929년 1월 12일∼13일에 인천시에서 개최되었던 명창들의 예술공연. 국악연주회.
동아일보에서 1964년 소극장운동을 활성화시켜 연극예술을 중흥케 한다는 목표로 제정한 연극상. 문화축제.
동아연극상 (東亞演劇賞)
동아일보에서 1964년 소극장운동을 활성화시켜 연극예술을 중흥케 한다는 목표로 제정한 연극상. 문화축제.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대회에서 채택한 선언.
자유언론실천선언 (自由言論實踐宣言)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대회에서 채택한 선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1975년 박정희 군사정권과 동아일보사의 경영진에 의해 쫓겨난 동아일보 기자들이 결성한 조직이다. 해당 언론사 경영진에 맞서 해직기자들의 복직과 언론의 민주화, 자유언론을 실천하기 위한 효율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결성하였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東亞自由言論守護鬪爭委員會)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1975년 박정희 군사정권과 동아일보사의 경영진에 의해 쫓겨난 동아일보 기자들이 결성한 조직이다. 해당 언론사 경영진에 맞서 해직기자들의 복직과 언론의 민주화, 자유언론을 실천하기 위한 효율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결성하였다.
송건호는 대한민국의 언론인으로, 국민주 방식의 모금 운동을 토대로 1988년 일간신문 『한겨레』의 창간을 이끌었다. 『한국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을 두루 거친 언론인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 중인 1975년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과 기자 대량 해임 사태의 해결을 촉구하며 자진 사임하였다.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 의장을 맡아 해직 기자들과 함께 1985년 월간지 『말』을 중심으로 민주언론운동을 펼쳤다.
송건호 (宋建鎬)
송건호는 대한민국의 언론인으로, 국민주 방식의 모금 운동을 토대로 1988년 일간신문 『한겨레』의 창간을 이끌었다. 『한국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을 두루 거친 언론인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 중인 1975년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과 기자 대량 해임 사태의 해결을 촉구하며 자진 사임하였다.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 의장을 맡아 해직 기자들과 함께 1985년 월간지 『말』을 중심으로 민주언론운동을 펼쳤다.
최수향은 1919년 광주 3·1운동에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03년 전라남도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광주 수피아여학교 재학 중 광주 읍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결혼 후 동아일보 광주지국 기자로 활동하였다. 1986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최수향 (崔秀香)
최수향은 1919년 광주 3·1운동에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03년 전라남도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광주 수피아여학교 재학 중 광주 읍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결혼 후 동아일보 광주지국 기자로 활동하였다. 1986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철필』은 1930년 7월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현직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간행된 신문 관련 잡지이다. 1930년 9월, 3호까지는 매월 간행되었지만 이후 간행이 중단되었고, 1931년 1월 제4호를 마지막으로 종간되었다. 중외일보 사회부 기자로 있던 임인식이 편집인 겸 발행인이었다.
철필 (鐵筆)
『철필』은 1930년 7월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현직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간행된 신문 관련 잡지이다. 1930년 9월, 3호까지는 매월 간행되었지만 이후 간행이 중단되었고, 1931년 1월 제4호를 마지막으로 종간되었다. 중외일보 사회부 기자로 있던 임인식이 편집인 겸 발행인이었다.
「전억망 일대기」는 1933년 최영수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네칸만화이다. 식민지 조선의 빈곤한 지식인의 표상인 「전억망 일대기」는 실업편, 연애편, 무자막, 종결편 총 4편의 시리즈로 구성되었다. 근대적 문물에 빛나는 경성의 속물적 인간 군상과 그 이면에 가려진 비참한 조선 민중의 현실을 풍자했다. 스스로를 룸펜이라 자조하는 전억망은 시대적 상황을 고민하고 비판적 시선으로 세태를 읽어내며 당대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전억망 일대기 (전억망 一代記)
「전억망 일대기」는 1933년 최영수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네칸만화이다. 식민지 조선의 빈곤한 지식인의 표상인 「전억망 일대기」는 실업편, 연애편, 무자막, 종결편 총 4편의 시리즈로 구성되었다. 근대적 문물에 빛나는 경성의 속물적 인간 군상과 그 이면에 가려진 비참한 조선 민중의 현실을 풍자했다. 스스로를 룸펜이라 자조하는 전억망은 시대적 상황을 고민하고 비판적 시선으로 세태를 읽어내며 당대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백두산사진환등회는 1920~30년대 사진을 통한 계몽교육의 일환으로 『동아일보』가 "특사환등사용백두산강연회" 등의 이름으로 시행한 일종의 백두산 사진이미지 전시회이다. 백두산은 오랫동안 한국 민족의 발원지이자 성산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지라는 기치를 내걸고 창간한 『동아일보』가 백두산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관련 기사를 쓰고 기획한 행사 중 하나인 '슬라이드 쇼'였다.
백두산사진환등회 (白頭山寫眞幻燈會)
백두산사진환등회는 1920~30년대 사진을 통한 계몽교육의 일환으로 『동아일보』가 "특사환등사용백두산강연회" 등의 이름으로 시행한 일종의 백두산 사진이미지 전시회이다. 백두산은 오랫동안 한국 민족의 발원지이자 성산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지라는 기치를 내걸고 창간한 『동아일보』가 백두산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관련 기사를 쓰고 기획한 행사 중 하나인 '슬라이드 쇼'였다.
「시상대 위의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중 손기정의 모습을 담은 『오사카아사히신문』 게재 사진으로서 일장기 말소사건 사진의 원본이다. 『오사카아사히신문』 사진부 사사키 기자가 촬영한 사진으로서 손기정 선수는 월계관을 쓰고 손에는 월계수 화분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진은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 가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어있는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하여 큰 파장을 일으킨 일명 ‘일장기 말소 사건 ’ 또는 ‘일장기 표식 말소’의 원본이 되는 사진이다.
시상대 위의 손기정 (施賞臺―孫基禎)
「시상대 위의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중 손기정의 모습을 담은 『오사카아사히신문』 게재 사진으로서 일장기 말소사건 사진의 원본이다. 『오사카아사히신문』 사진부 사사키 기자가 촬영한 사진으로서 손기정 선수는 월계관을 쓰고 손에는 월계수 화분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진은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 가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어있는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하여 큰 파장을 일으킨 일명 ‘일장기 말소 사건 ’ 또는 ‘일장기 표식 말소’의 원본이 되는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