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미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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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존속한 남한 통치를 위한 미국의 군정청.
미군정청 (美軍政廳)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존속한 남한 통치를 위한 미국의 군정청.
미소군정기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반도의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남한과 북한을 각기 통치했던 기간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한반도를 패전국과 같은 분할점령지역으로 설정하여,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점령군으로서 주둔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이 기간 동안 국내에서는 하나의 독립국가 건설을 놓고 여러 견해가 치열하게 충돌했고, 미국과 소련도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어 수차례 협상을 진행했지만, 모든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남과 북에 각기 다른 정권이 수립되면서 남북분단이 고착화되었다.
미소군정기 (美蘇軍政期)
미소군정기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반도의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남한과 북한을 각기 통치했던 기간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한반도를 패전국과 같은 분할점령지역으로 설정하여,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점령군으로서 주둔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이 기간 동안 국내에서는 하나의 독립국가 건설을 놓고 여러 견해가 치열하게 충돌했고, 미국과 소련도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어 수차례 협상을 진행했지만, 모든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남과 북에 각기 다른 정권이 수립되면서 남북분단이 고착화되었다.
1946년 9월 24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이 전국적 규모로 일으킨 미군정기 최대의 총파업.
9월 총파업 (九月 總罷業)
1946년 9월 24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이 전국적 규모로 일으킨 미군정기 최대의 총파업.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안재홍 (安在鴻)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신익희는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내무총장, 국회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고종 31)에 태어나 1956년에 사망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되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3·1운동 후 상해로 떠나 26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중책을 맡았다. 귀국 후 임시정부 계통과 노선을 달리했고,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여 장면·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고 1956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 유세활동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신익희 (申翼熙)
신익희는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내무총장, 국회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고종 31)에 태어나 1956년에 사망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되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3·1운동 후 상해로 떠나 26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중책을 맡았다. 귀국 후 임시정부 계통과 노선을 달리했고,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여 장면·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고 1956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 유세활동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송진우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역임한 언론인, 정치인,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전남 담양 출생으로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환 후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1921년 동아일보 3대 사장에 취임한 뒤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를 위한 브나로드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1934년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지지하였다. 1936년 8월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건으로 사임하였다. 광복 후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였고 한국민주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수석총무에 추대되었다.
송진우 (宋鎭禹)
송진우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역임한 언론인, 정치인,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전남 담양 출생으로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환 후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1921년 동아일보 3대 사장에 취임한 뒤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를 위한 브나로드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1934년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지지하였다. 1936년 8월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건으로 사임하였다. 광복 후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였고 한국민주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수석총무에 추대되었다.
1945년 12월 8일에 결성된 전국적인 농민운동 연합체.
전국농민조합총연맹 (全國農民組合總聯盟)
1945년 12월 8일에 결성된 전국적인 농민운동 연합체.
좌우 합작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1946년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조직된 정치 기구.
좌우합작위원회 (左右合作委員會)
좌우 합작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1946년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조직된 정치 기구.
해방 이후 국무총리, 부통령 등을 역임한 정치인.
장면 (張勉)
해방 이후 국무총리, 부통령 등을 역임한 정치인.
1946년 임시정부 진영을 중심으로 소집·구성한 우익 정치세력들의 통일전선체.
비상정치회의주비회 (非常政治會議籌備會)
1946년 임시정부 진영을 중심으로 소집·구성한 우익 정치세력들의 통일전선체.
미군정 법령에 의해 설립된 일제 귀속재산을 소유·관리한 회사.
신한공사 (新韓公社)
미군정 법령에 의해 설립된 일제 귀속재산을 소유·관리한 회사.
1946년 5월 1일 창설된 군 간부 양성학교.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南朝鮮國防警備士官學校)
1946년 5월 1일 창설된 군 간부 양성학교.
군정법령 제33호는 1945년 12월 6일 미군정이 「조선내 소재 일본인재산권 취득의 건」을 규정한 법령이다. 1945년 9월 25일의 군정법령 제2호로 패전국의 재산을 동결하였는데, 군정법령 제33호는 조선 내에 있는 일본 정부와 일본인의 모든 재산을 조선 군정청이 접수한다는 내용으로 귀속재산의 범위를 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군정법령 제33호 (軍政法令 第三十三號)
군정법령 제33호는 1945년 12월 6일 미군정이 「조선내 소재 일본인재산권 취득의 건」을 규정한 법령이다. 1945년 9월 25일의 군정법령 제2호로 패전국의 재산을 동결하였는데, 군정법령 제33호는 조선 내에 있는 일본 정부와 일본인의 모든 재산을 조선 군정청이 접수한다는 내용으로 귀속재산의 범위를 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대한경제보국회는 1945년 12월 12일 미군정의 후원과 이승만의 주도로 김홍량, 민규식, 최창제 등 친일 경제인들이 조직한 단체이다. 대한경제보국회는 우익 진영 내 최초의 정치자금 조달 창구로서 해방 공간에서 우익 진영의 내부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대한경제보국회 (大韓經濟輔國會)
대한경제보국회는 1945년 12월 12일 미군정의 후원과 이승만의 주도로 김홍량, 민규식, 최창제 등 친일 경제인들이 조직한 단체이다. 대한경제보국회는 우익 진영 내 최초의 정치자금 조달 창구로서 해방 공간에서 우익 진영의 내부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관재처는 1946년 미군정기 일본인이나 일본 정부로부터 귀속된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했던 부서이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 법령 제33호에 따라 미군정청에 귀속된 일본인 재산인을 접수하고 관리하였는데, 귀속재산의 접수 및 조사, 소유권 관련 법적 문제 해결을 주업무로 하였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귀속재산처리법이 갖추어지면서 귀속재산불하를 위한 사무를 담당하기 위해 설치된 관재청으로 이어졌다.
관재처 (管財處)
관재처는 1946년 미군정기 일본인이나 일본 정부로부터 귀속된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했던 부서이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 법령 제33호에 따라 미군정청에 귀속된 일본인 재산인을 접수하고 관리하였는데, 귀속재산의 접수 및 조사, 소유권 관련 법적 문제 해결을 주업무로 하였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귀속재산처리법이 갖추어지면서 귀속재산불하를 위한 사무를 담당하기 위해 설치된 관재청으로 이어졌다.
사회노동당은 1946년 11월 17일 조선공산당 간부파가 주도하는 좌익 3당합동에 반대해 조선공산당 대회파와 조선인민당 및 남조선신민당의 조건부합당파가 만든 좌익 계열의 정당이다. 남조선노동당과 경쟁하며 좌익 정당의 통합을 추진했으나 북조선노동당이 남조선노동당의 권위를 인정하고 사회노동당의 대중조직 장악에 한계가 드러나면서 1947년 2월 27일 해체를 결정하였다.
사회로동당 (社會勞動黨)
사회노동당은 1946년 11월 17일 조선공산당 간부파가 주도하는 좌익 3당합동에 반대해 조선공산당 대회파와 조선인민당 및 남조선신민당의 조건부합당파가 만든 좌익 계열의 정당이다. 남조선노동당과 경쟁하며 좌익 정당의 통합을 추진했으나 북조선노동당이 남조선노동당의 권위를 인정하고 사회노동당의 대중조직 장악에 한계가 드러나면서 1947년 2월 27일 해체를 결정하였다.
한라단은 1945년 9월 7일 일본 군대 등에서 귀환한 제주 읍내 청년들을 중심으로 친일파를 응징하여 새로운 질서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갖고 결성된 단체이다. 사설 치안단체로서 치안활동을 벌이던 중 건국준비위원회 및 인민위원회 산하의 치안대와 갈등을 빚었고, 제주도 내에서 미군과 인민위원회가 처음으로 충돌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한라단 (漢拏團)
한라단은 1945년 9월 7일 일본 군대 등에서 귀환한 제주 읍내 청년들을 중심으로 친일파를 응징하여 새로운 질서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갖고 결성된 단체이다. 사설 치안단체로서 치안활동을 벌이던 중 건국준비위원회 및 인민위원회 산하의 치안대와 갈등을 빚었고, 제주도 내에서 미군과 인민위원회가 처음으로 충돌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주간신보』는 1945년 10월 15일 미군정 공보부가 정책 홍보를 위해 창간한 국한문 혼용의 주간 신문이다. 타블로이드 2면의 9단 지면으로 제작되었으며 창간호 40만부에 이어 1946년부터는 80만부를 발행해 전국으로 배포하였다. 1947년부터는 서울판을 따로 제작할 정도로 도시민에 집중하였다. 미군정의 기관지 성격이었기에 주로 미군정의 정책과 활동을 중심으로 세계 뉴스를 비롯해 다양한 기사를 게재하였다. 1947년 4월 용지 부족을 이유로 정간되었으나, 이후 재발행되지 않아 사실상 폐간된 셈이었다.
주간신보 (週刊新報)
『주간신보』는 1945년 10월 15일 미군정 공보부가 정책 홍보를 위해 창간한 국한문 혼용의 주간 신문이다. 타블로이드 2면의 9단 지면으로 제작되었으며 창간호 40만부에 이어 1946년부터는 80만부를 발행해 전국으로 배포하였다. 1947년부터는 서울판을 따로 제작할 정도로 도시민에 집중하였다. 미군정의 기관지 성격이었기에 주로 미군정의 정책과 활동을 중심으로 세계 뉴스를 비롯해 다양한 기사를 게재하였다. 1947년 4월 용지 부족을 이유로 정간되었으나, 이후 재발행되지 않아 사실상 폐간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