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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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계는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이 만든 무술 연마 조직이다. 고향으로 낙향한 정여립은 김제 · 진안의 별장을 왕래하며 강학(講學)을 가탁(假託)하여 이웃 고을의 여러 무사, 공천 · 사천의 장용(壯勇)한 사람 등과 대동계를 만들어 매월 15일에 한곳에 모여 활쏘기를 겨루고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즐겼다. 그러나 정여립이 모반 혐의를 받고 추격을 당하던 중 자살하여 그 실체에 대해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대동계 (大同契)
대동계는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이 만든 무술 연마 조직이다. 고향으로 낙향한 정여립은 김제 · 진안의 별장을 왕래하며 강학(講學)을 가탁(假託)하여 이웃 고을의 여러 무사, 공천 · 사천의 장용(壯勇)한 사람 등과 대동계를 만들어 매월 15일에 한곳에 모여 활쏘기를 겨루고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즐겼다. 그러나 정여립이 모반 혐의를 받고 추격을 당하던 중 자살하여 그 실체에 대해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노론은 조선 후기, 붕당(朋黨)의 한 정파로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로 서인에서 갈려 나온 당파이다. 1680년(숙종 6)의 경신환국 이후 남인에 대한 정탐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노장파 인사들이 소장파 관료들의 배척을 받은 것을 계기로 성립되었다. 노론은 격화되는 당쟁의 와중에 숙종~경종 대에 수차례 화란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훈척가의 영향력과 송시열·송준길 등에서 연원한 문인 집단의 결집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회복, 확장하여 조선 말까지 조정의 주도 세력 지위를 유지하였다.
노론 (老論)
노론은 조선 후기, 붕당(朋黨)의 한 정파로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로 서인에서 갈려 나온 당파이다. 1680년(숙종 6)의 경신환국 이후 남인에 대한 정탐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노장파 인사들이 소장파 관료들의 배척을 받은 것을 계기로 성립되었다. 노론은 격화되는 당쟁의 와중에 숙종~경종 대에 수차례 화란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훈척가의 영향력과 송시열·송준길 등에서 연원한 문인 집단의 결집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회복, 확장하여 조선 말까지 조정의 주도 세력 지위를 유지하였다.
1583년 1월부터 12월까지의 동서당론에 관계된 기사를 모아 수록한 정치서. 잡저.
계미기사 (癸未記事)
1583년 1월부터 12월까지의 동서당론에 관계된 기사를 모아 수록한 정치서. 잡저.
도서는 조선시대 왜인의 통제를 위해 일본의 지방 호족이나 대마도주에게 지급한 도장이다. 조선 전기부터 사용되었으며 1635년 이후에는 사급 대상이 대마도주로 한정되었다. 대마도주가 물러나거나 사망하면 도서를 조선 정부에 반납해야 했지만 지켜지지 않고 부정한 사용의 예가 자주 발생하였다. 1872년 일본의 명치 정부가 대마번의 대조선 무역을 중지하면서 폐지되었다. 도서는 실물로 ‘길견(吉見)’, ‘의달(義達)’, ‘숭통(崇統)’ 등이 새겨진 대략 23개 정도가 현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대일 외교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제도이다.
도서 (圖書)
도서는 조선시대 왜인의 통제를 위해 일본의 지방 호족이나 대마도주에게 지급한 도장이다. 조선 전기부터 사용되었으며 1635년 이후에는 사급 대상이 대마도주로 한정되었다. 대마도주가 물러나거나 사망하면 도서를 조선 정부에 반납해야 했지만 지켜지지 않고 부정한 사용의 예가 자주 발생하였다. 1872년 일본의 명치 정부가 대마번의 대조선 무역을 중지하면서 폐지되었다. 도서는 실물로 ‘길견(吉見)’, ‘의달(義達)’, ‘숭통(崇統)’ 등이 새겨진 대략 23개 정도가 현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대일 외교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제도이다.
서학은 통일신라시기에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선진학술과 사상을 배우고 익히던 행위이다. 서학이라는 용어는 신라 하대에 최치원이 처음 사용했으며 ‘서(西)’는 중국을 가리킨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나 송나라로 신라 하대에는 서학이 크게 유행하였다. 서학활동은 선종을 공부하려는 구법승과 골품제로 사회적 진출에 제약을 받던 6두품 출신의 도당유학생이 많았다. 신라는 서학을 통해 음양학·병법·기술학 등을 익혔다. 신라의 정치·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신라의 문화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어 하나의 체계적인 학문분야로 성립하지는 못하였다.
서학 (西學)
서학은 통일신라시기에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선진학술과 사상을 배우고 익히던 행위이다. 서학이라는 용어는 신라 하대에 최치원이 처음 사용했으며 ‘서(西)’는 중국을 가리킨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나 송나라로 신라 하대에는 서학이 크게 유행하였다. 서학활동은 선종을 공부하려는 구법승과 골품제로 사회적 진출에 제약을 받던 6두품 출신의 도당유학생이 많았다. 신라는 서학을 통해 음양학·병법·기술학 등을 익혔다. 신라의 정치·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신라의 문화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어 하나의 체계적인 학문분야로 성립하지는 못하였다.
북인은 조선시대 광해군 대 집권 세력이었던 붕당의 한 정파이다. 동인은 분당 이후 임진왜란 종전까지 20여 년 동안 정국을 주도했는데, 주류는 퇴계학파, 비주류는 남명 · 화담학파였다. 동인 비주류 세력이었던 북인은 1589년 기축옥사 당시 서인으로부터 큰 피해를 입었지만, 임진왜란 당시 적극적인 의병 참여와 주전론(主戰論)의 제기를 통해 세력을 키웠다. 광해군을 줄곧 지지했던 이들은 광해군이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집권 세력이 되었다.
북인 (北人)
북인은 조선시대 광해군 대 집권 세력이었던 붕당의 한 정파이다. 동인은 분당 이후 임진왜란 종전까지 20여 년 동안 정국을 주도했는데, 주류는 퇴계학파, 비주류는 남명 · 화담학파였다. 동인 비주류 세력이었던 북인은 1589년 기축옥사 당시 서인으로부터 큰 피해를 입었지만, 임진왜란 당시 적극적인 의병 참여와 주전론(主戰論)의 제기를 통해 세력을 키웠다. 광해군을 줄곧 지지했던 이들은 광해군이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집권 세력이 되었다.
선인(先人)은 삼국시대, 3세기부터 고구려에 있었던 관등이다. 선인이 설치된 기원은 3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7세기에도 총 13등급 관등제의 최하위 관등으로 등장한다. 말기에는 보통 관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사람이 처음 임용되면서 받는 관등이었다.
선인 (先人)
선인(先人)은 삼국시대, 3세기부터 고구려에 있었던 관등이다. 선인이 설치된 기원은 3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7세기에도 총 13등급 관등제의 최하위 관등으로 등장한다. 말기에는 보통 관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사람이 처음 임용되면서 받는 관등이었다.
조선 숙종 연간에 정권이 남인(南人)에게서 서인(西人)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정치적 사건.
유악남용사건 (油幄濫用事件)
조선 숙종 연간에 정권이 남인(南人)에게서 서인(西人)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정치적 사건.
1589년(선조 22)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
평난공신 (平難功臣)
1589년(선조 22)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
조선시대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
정사공신 (靖社功臣)
조선시대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
조선후기 학자 이승연이 조선시대 붕당의 형성과정과 주요 논쟁들을 대화체로 서술한 문답서. 정치서·유학서.
호락문답 (湖洛問答)
조선후기 학자 이승연이 조선시대 붕당의 형성과정과 주요 논쟁들을 대화체로 서술한 문답서. 정치서·유학서.
조선후기 의 정치적 대립에 관한 사실을을 기록한 정치서. 당쟁기록.
형감합편 (衡鑑合編)
조선후기 의 정치적 대립에 관한 사실을을 기록한 정치서. 당쟁기록.
1694년 갑술환국으로 재집권한 서인이 보사공신 회맹 때의 회맹문과 복훈 때의 축문 등을 모아 엮은 관찬서.
20공신회맹축 - 보사공신녹훈후 (二十功臣會盟軸 - 保社功臣錄勳後)
1694년 갑술환국으로 재집권한 서인이 보사공신 회맹 때의 회맹문과 복훈 때의 축문 등을 모아 엮은 관찬서.
문묘출향은 1689년(숙종 15) 3월 문묘에 배향되어 있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위판을 문묘에서부터 축출하고 제사를 폐지한 사건이다. 1624년 서인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을 건의하였으나 남인은 이이가 불교에 빠진 전력과 성혼의 왜란 시 과오를 들어 반대하였다. 서인과 남인의 당론으로 논쟁이 지속되다가 1682년 김석주와 송시열이 주도하여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출향이 결정되었고 1694년 갑술환국으로 복향되었다. 문묘출향과 복향은 서인과 남인 간의 당쟁 향배와 추이를 같이 하였으며, 많은 정치 사회적 분란과 갈등을 유발하였다.
문묘출향 (文廟黜享)
문묘출향은 1689년(숙종 15) 3월 문묘에 배향되어 있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위판을 문묘에서부터 축출하고 제사를 폐지한 사건이다. 1624년 서인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을 건의하였으나 남인은 이이가 불교에 빠진 전력과 성혼의 왜란 시 과오를 들어 반대하였다. 서인과 남인의 당론으로 논쟁이 지속되다가 1682년 김석주와 송시열이 주도하여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출향이 결정되었고 1694년 갑술환국으로 복향되었다. 문묘출향과 복향은 서인과 남인 간의 당쟁 향배와 추이를 같이 하였으며, 많은 정치 사회적 분란과 갈등을 유발하였다.
갑인예송은 1674년(현종 15) 효종 왕비 인선왕후의 국상에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예송 사건이다. 인선왕후가 장자의 부인인가 차자의 부인인가에 따라 자의대비는 기년복 혹은 대공복을 입어야 했는데, 이는 효종이 장자인가 차자인가 하는 효종의 종통과도 연관된 문제였다. 현종은 효종의 종통을 문란하게 만든 서인의 대공복 논리에 분노하여 복제를 기년복으로 개정하고 서인을 처벌하였다. 복제 개정 후 한 달여 만에 현종이 승하하자 14세의 나이에 즉위한 숙종은 장례 후 과감히 서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남인을 등용하여 정국을 개편했다.
갑인예송 (甲寅禮訟)
갑인예송은 1674년(현종 15) 효종 왕비 인선왕후의 국상에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예송 사건이다. 인선왕후가 장자의 부인인가 차자의 부인인가에 따라 자의대비는 기년복 혹은 대공복을 입어야 했는데, 이는 효종이 장자인가 차자인가 하는 효종의 종통과도 연관된 문제였다. 현종은 효종의 종통을 문란하게 만든 서인의 대공복 논리에 분노하여 복제를 기년복으로 개정하고 서인을 처벌하였다. 복제 개정 후 한 달여 만에 현종이 승하하자 14세의 나이에 즉위한 숙종은 장례 후 과감히 서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남인을 등용하여 정국을 개편했다.
기해예송은 1659년(현종 즉위) 효종이 죽자 계모였던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의 종류를 두고 일어났던 서인과 남인의 예절에 관한 논쟁이다. 이 논쟁은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서인은 효종을 둘째로 인식하여 일 년을 입는 기년복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에 해당한다고 하여 삼년복을 주장하였다. 논의 끝에 기년복이 채택되었는데, 남인 윤선도가 서인들의 기년설을 ‘효종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이분화’한 것이라고 공격하였다. 이에 서인들이 윤선도를 탄핵하고 예송에 가담한 남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정권을 독점하였다.
기해예송 (己亥禮訟)
기해예송은 1659년(현종 즉위) 효종이 죽자 계모였던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의 종류를 두고 일어났던 서인과 남인의 예절에 관한 논쟁이다. 이 논쟁은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서인은 효종을 둘째로 인식하여 일 년을 입는 기년복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에 해당한다고 하여 삼년복을 주장하였다. 논의 끝에 기년복이 채택되었는데, 남인 윤선도가 서인들의 기년설을 ‘효종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이분화’한 것이라고 공격하였다. 이에 서인들이 윤선도를 탄핵하고 예송에 가담한 남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정권을 독점하였다.
1689년(숙종 15) 1월 숙종이 희빈 장씨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호칭을 정하자, 송시열이 이를 부당한 것으로 비판한 사건.
원자정호 (元子定號)
1689년(숙종 15) 1월 숙종이 희빈 장씨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호칭을 정하자, 송시열이 이를 부당한 것으로 비판한 사건.
임술삼고변은 1682년(숙종 8)에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 김석주·김익훈 일파가 남인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함정 수사로 3건의 역모를 고발한 사건이다. 김석주는 남인들의 역모를 고발한 익명서가 나오자 김익훈 등을 통해 남인들을 감시하면서 함정 수사하여 증거를 수집하였다. 김환은 허영·허새를 김익훈은 유명견을 김중하는 민암 등을 역모로 고발하였다. 이 중 허영·허새는 역모를 자백하였으나 나머지 2건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밝혀졌다. 때문에 이 사건은 부도덕한 정치 공작으로 비판을 받았다. 기사환국 때 남인들의 보복이 이어졌다.
임술삼고변 (壬戌三告變)
임술삼고변은 1682년(숙종 8)에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 김석주·김익훈 일파가 남인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함정 수사로 3건의 역모를 고발한 사건이다. 김석주는 남인들의 역모를 고발한 익명서가 나오자 김익훈 등을 통해 남인들을 감시하면서 함정 수사하여 증거를 수집하였다. 김환은 허영·허새를 김익훈은 유명견을 김중하는 민암 등을 역모로 고발하였다. 이 중 허영·허새는 역모를 자백하였으나 나머지 2건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밝혀졌다. 때문에 이 사건은 부도덕한 정치 공작으로 비판을 받았다. 기사환국 때 남인들의 보복이 이어졌다.
1680(숙종 5년) 허견(許堅)의 역모에 관련된 유혁연(柳赫然)의 옥사.
유혁연 옥사 (柳赫然 獄事)
1680(숙종 5년) 허견(許堅)의 역모에 관련된 유혁연(柳赫然)의 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