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이화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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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은 일제강점기 아우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에 태어나 1920년에 사망했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1916년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 소식을 전한 후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검거되어 투옥 중에도 옥중만세운동을 벌였고,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유관순 (柳寬順)
유관순은 일제강점기 아우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에 태어나 1920년에 사망했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1916년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 소식을 전한 후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검거되어 투옥 중에도 옥중만세운동을 벌였고,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대한제국기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 최초의 여의사의료인. 여의사.
박에스더 (朴Esther)
대한제국기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 최초의 여의사의료인. 여의사.
여메례는 일제강점기 청주교회 전도사, 조치원교회 전도사로 시무한 개신교인이자 교육자이다. 1872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났다.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며 ‘메리’라는 세례명을 받았는데 메례는 메리의 한자 음역이다. 진명여학교에서 학감을 맡았고 영어가 능통해 어전통역관 등으로 활동했다. 1923년에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을 졸업했다. 1925년부터 성서학원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1929년에는 여자부 사감이 되었다. 1931년 사감직을 사임하고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1933년 조치원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던 중 사망하였다.
여메례 (余袂禮)
여메례는 일제강점기 청주교회 전도사, 조치원교회 전도사로 시무한 개신교인이자 교육자이다. 1872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났다.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며 ‘메리’라는 세례명을 받았는데 메례는 메리의 한자 음역이다. 진명여학교에서 학감을 맡았고 영어가 능통해 어전통역관 등으로 활동했다. 1923년에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을 졸업했다. 1925년부터 성서학원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1929년에는 여자부 사감이 되었다. 1931년 사감직을 사임하고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1933년 조치원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던 중 사망하였다.
일제강점기 YWCA 이사, 근우회 창설 발기인, 조선여선교회 회계 등으로 활동한 여성운동가. 개신교인, 사회사업가, 교육자.
양매륜 (梁邁倫)
일제강점기 YWCA 이사, 근우회 창설 발기인, 조선여선교회 회계 등으로 활동한 여성운동가. 개신교인, 사회사업가, 교육자.
유예도는 1919년 천안 아우내장터 3·1운동을 이끈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이화학당에 재학 중이던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학교 선배로부터 고향으로 내려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3월 13일에 사촌 동생 유관순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귀향하였다. 4월 1일, 3,000여 명이 운집한 아우내장터에서 유관순과 함께 직접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유예도 (柳禮道)
유예도는 1919년 천안 아우내장터 3·1운동을 이끈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이화학당에 재학 중이던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학교 선배로부터 고향으로 내려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3월 13일에 사촌 동생 유관순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귀향하였다. 4월 1일, 3,000여 명이 운집한 아우내장터에서 유관순과 함께 직접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문재민은 일제강점기 기생으로 활동하다 황해도 해주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어린 시절 가난으로 인해 기생이 되었으며, 1919년 4월 1일 기생조합 동료들과 함께 황해도 해주군 해주 읍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 행진하였고, 단상에 올라 연설도 하였다. 다른 기생들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는 학업에 전념하였다.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문재민 (文載敏)
문재민은 일제강점기 기생으로 활동하다 황해도 해주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어린 시절 가난으로 인해 기생이 되었으며, 1919년 4월 1일 기생조합 동료들과 함께 황해도 해주군 해주 읍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 행진하였고, 단상에 올라 연설도 하였다. 다른 기생들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는 학업에 전념하였다.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박승일은 일제강점기 대한애국부인회의 일원으로 군자금 등을 모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월할 목적으로 평양 지역 감리교 여성 신자들과 함께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장로교파 애국부인회와 연합하여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1920년 10월까지 2,400여 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박승일 (朴昇一)
박승일은 일제강점기 대한애국부인회의 일원으로 군자금 등을 모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월할 목적으로 평양 지역 감리교 여성 신자들과 함께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장로교파 애국부인회와 연합하여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1920년 10월까지 2,400여 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앨리스는 일제강점기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를 역임한 여성 음악가이자 교육자이다. 1914년에 이화학당 대학과를 1회로 졸업하였다. 이후 나가사키의 갓스이여자전문학교에서 3년 동안 음악을 공부하였다. 1923년에는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엘리슨 화이트 음악학교 정규 과정을 마쳤으며, 1925년에는 오리건대학에서 음악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25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음악과를 만들고 음악 교육의 정착과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근대적 여성상의 모범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김앨리스 (金앨리스)
김앨리스는 일제강점기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를 역임한 여성 음악가이자 교육자이다. 1914년에 이화학당 대학과를 1회로 졸업하였다. 이후 나가사키의 갓스이여자전문학교에서 3년 동안 음악을 공부하였다. 1923년에는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엘리슨 화이트 음악학교 정규 과정을 마쳤으며, 1925년에는 오리건대학에서 음악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25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음악과를 만들고 음악 교육의 정착과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근대적 여성상의 모범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김합라는 일제강점기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교수로 가정학 교육에 이바지한 여성 교육자이다.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가정학을 전공한 첫 번째 여성 석사이다. 이화여자전문학교에 국내 최초의 가사과를 설치하고 초대 학과장을 맡았다. 이후 여러 제자를 길러내며 한국 가정학의 토대를 쌓았다. 미국 유학 이전에는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하였다.
김합라 (金合羅)
김합라는 일제강점기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교수로 가정학 교육에 이바지한 여성 교육자이다.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가정학을 전공한 첫 번째 여성 석사이다. 이화여자전문학교에 국내 최초의 가사과를 설치하고 초대 학과장을 맡았다. 이후 여러 제자를 길러내며 한국 가정학의 토대를 쌓았다. 미국 유학 이전에는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하였다.
하란사는 일제강점기 여성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신여성이다. 본명은 김란사(金蘭史)이며 이화학당 입학 후 일본과 미국에서 수학하였다.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이화학당에 부임하여 학생들에게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고 여성 교육과 독립운동에 힘썼다. 한일합병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준비 중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북경에서 별세하였다.
하란사 (河蘭史)
하란사는 일제강점기 여성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신여성이다. 본명은 김란사(金蘭史)이며 이화학당 입학 후 일본과 미국에서 수학하였다.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이화학당에 부임하여 학생들에게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고 여성 교육과 독립운동에 힘썼다. 한일합병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준비 중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북경에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