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조선노동공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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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위원, 제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운동가}.
강달영 (姜達永)
일제강점기 때,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위원, 제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운동가}.
1920년 갈돕회에서 조직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하였던 극단.
갈돕회순회연극단 (갈돕會巡廻演劇團▽)
1920년 갈돕회에서 조직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하였던 극단.
일제강점기 때, 신민회에서 활동하며 청년학우회와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였고, 조선노동공제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박중화 (朴重華)
일제강점기 때, 신민회에서 활동하며 청년학우회와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였고, 조선노동공제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김명식은 일제강점기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하며 유학생 운동에 참가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 주필과 논설반원으로 활약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다가 신생활사 필화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20~1930년대 사회운동, 한국사, 문예운동 등에 관한 논설을 다수 발표하였다. 1928~1936년 일본 오사카에 체류하며 재일조선인 운동에 관여하였다. 중일전쟁기에는 일본의 정책에 기대를 걸고 조선의 지위 향상을 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김명식 (金明植)
김명식은 일제강점기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하며 유학생 운동에 참가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 주필과 논설반원으로 활약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다가 신생활사 필화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20~1930년대 사회운동, 한국사, 문예운동 등에 관한 논설을 다수 발표하였다. 1928~1936년 일본 오사카에 체류하며 재일조선인 운동에 관여하였다. 중일전쟁기에는 일본의 정책에 기대를 걸고 조선의 지위 향상을 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김성숙은 일제강점기 조선의용대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승려이다. 1898년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호는 운암(雲巖), 성숙(星淑)은 법명이다. 1916년 독립군에 가담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했다. 주요 독립운동 활동으로 3·1 운동 주도, 조선의열단 가담, 조선의용대 조직 및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역임 등이 있다. 광복 후 여운형과 좌우합작을 지지하였으며, 진보당사건(1955년)으로 큰 탄압을 받았다. 1969년 서거하였으며,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성숙 (金星淑)
김성숙은 일제강점기 조선의용대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승려이다. 1898년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호는 운암(雲巖), 성숙(星淑)은 법명이다. 1916년 독립군에 가담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했다. 주요 독립운동 활동으로 3·1 운동 주도, 조선의열단 가담, 조선의용대 조직 및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역임 등이 있다. 광복 후 여운형과 좌우합작을 지지하였으며, 진보당사건(1955년)으로 큰 탄압을 받았다. 1969년 서거하였으며,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김약수 (金若水)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유진희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와 신생활사, 조선공산당 등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였고, 『시대일보』, 『신계단』 등 언론계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언론인이다. 1920~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운동과 잡지 발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해방 공간에서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등 정치 활동에 매진하였다.
유진희 (兪鎭熙)
유진희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와 신생활사, 조선공산당 등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였고, 『시대일보』, 『신계단』 등 언론계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언론인이다. 1920~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운동과 잡지 발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해방 공간에서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등 정치 활동에 매진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신민회, 대동청년단, 서로군정서, 광한단, 조선노동총동맹 등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신백우 (申伯雨)
일제강점기 때, 신민회, 대동청년단, 서로군정서, 광한단, 조선노동총동맹 등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정운해는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노동운동가이다. 조선노동공제회 내에 ‘마르크스주의 크루조크’를 결성하였고, 남선노농동맹과 조선노농총동맹 등에서 노농운동을 전개하였다. 북풍파로,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이자 노농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건국동맹 경북지부 책임자와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에서 활동하였다.
정운해 (鄭雲海)
정운해는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노동운동가이다. 조선노동공제회 내에 ‘마르크스주의 크루조크’를 결성하였고, 남선노농동맹과 조선노농총동맹 등에서 노농운동을 전개하였다. 북풍파로,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이자 노농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건국동맹 경북지부 책임자와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에서 활동하였다.
차금봉은 일제강점기 노동운동가이자 사회주의운동가이다. 기관차 화부로 3·1운동 당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조선노동공제회 중앙집행위원장, 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 등으로 노동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로 활동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차금봉 (車今奉)
차금봉은 일제강점기 노동운동가이자 사회주의운동가이다. 기관차 화부로 3·1운동 당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조선노동공제회 중앙집행위원장, 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 등으로 노동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로 활동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김사용은 경상북도 상주 출신으로, 휘문의숙을 졸업한 후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교남학우회를 중심으로 경상북도 일대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항일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하면서 1920년 '폭탄밀조사건', 1923년 무장투쟁 단체인 의열단의 거사 계획 사건으로 체포된 독립유공자이다.
김사용 (金思容)
김사용은 경상북도 상주 출신으로, 휘문의숙을 졸업한 후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교남학우회를 중심으로 경상북도 일대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항일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하면서 1920년 '폭탄밀조사건', 1923년 무장투쟁 단체인 의열단의 거사 계획 사건으로 체포된 독립유공자이다.
『공제』는 1920년 9월 10일 창간된 초기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이다. 제1호와 2호는 간행되었으나, 제3호[1920년 11월]부터 제6호[1921년 3월]는 조선총독부의 간행 불허로 발행이 금지되었으며 그 목차를 제7호[1921년 4월]에 게재하려 하였으나 그마저 삭제 당해 그 목차마저 알 수 없다. 창간호의 편집 겸 발행인은 조성돈, 인쇄인은 최성우, 발행소는 조선노동공제회였다. 1921년 6월 10일[통권 8호]로 종간하였다.
공제 (共濟)
『공제』는 1920년 9월 10일 창간된 초기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이다. 제1호와 2호는 간행되었으나, 제3호[1920년 11월]부터 제6호[1921년 3월]는 조선총독부의 간행 불허로 발행이 금지되었으며 그 목차를 제7호[1921년 4월]에 게재하려 하였으나 그마저 삭제 당해 그 목차마저 알 수 없다. 창간호의 편집 겸 발행인은 조성돈, 인쇄인은 최성우, 발행소는 조선노동공제회였다. 1921년 6월 10일[통권 8호]로 종간하였다.
이수영은 대한제국기인 1909년 대동청년당, 일제강점기인 1919년 의열단,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22~1923년 의열단과 서로군정서의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1923년 '경북의용단사건'으로 체포되어 1924년 징역 2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이다.
이수영 (李遂榮)
이수영은 대한제국기인 1909년 대동청년당, 일제강점기인 1919년 의열단,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22~1923년 의열단과 서로군정서의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1923년 '경북의용단사건'으로 체포되어 1924년 징역 2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