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李遂榮)은 1887년 12월 6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안동소학교(安東小學校)와 경성관립사범학교(京城官立師範學校)를 졸업하고 잠시 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69년 12월 17일 사망하였다.
1909년 안희제 등이 결성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참여하였다고 하며, 같은 해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건너가 금광(金鑛)에서 일하였고, 모스크바에서 연초상(煙草商)을 운영하였다.
1916년 귀국하여 충청남도 예산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1920년부터 서울에서 여관과 미곡상을 운영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연락 거점으로 삼았다. 이 무렵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고도 한다.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에 가입하였으며, 이듬해 조선노동공제회 소비조합 전무이사로 선임되었다. 1922년 단연동맹회(斷煙同盟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조선노동공제회의 내분 때 상대파의 습격을 받기도 하였다.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의 의열사건 때 연락처를 제공하였다는 혐의로 검거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 사상단체인 서울청년회와 북성회(北星會)의 충돌 때 또다시 검거되었으나, 역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1923년 3월경 인천의 이택용으로부터 권총과 실탄을 입수하였고, 7월 최윤동과 함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지방 부호들을 대상으로 모금할 것을 협의하였다. 12월에는 권총을 휴대하고 대구로 내려와 최윤동 및 김봉규 · 노기용 · 송두환 · 정내영 · 정동석 · 정두규 · 정두은 등과 함께 협의 후 최윤동과 함께 군위의 부호를 대상으로 모금하려 가던 중 칠곡의 송림사(松林寺)에 투숙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경북의용단사건(慶北義勇團事件)'이라 불렸으며, 이수영과 노기용 · 정두규 · 최윤동 등은 취조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재판 도중 의사의 감정을 받았으나, 결국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수영은 1924년 10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았고, 11월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징역 2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6년 9월에 가석방되었다.
19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