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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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4년(효공왕 8)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당나라 고승 법장(法藏)의 전기.
당대천복사고사주번경대덕법장화상전 (唐大薦福寺故寺主飜經大德法藏和尙傳)
904년(효공왕 8)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당나라 고승 법장(法藏)의 전기.
898년(효공왕 2) 신라 말의 학자 최치원(崔致遠)이 해인사의 사역(寺域)을 확정한 전후 사실을 기록한 글.
가야산해인사결계량기 (伽倻山海印寺結界場記)
898년(효공왕 2) 신라 말의 학자 최치원(崔致遠)이 해인사의 사역(寺域)을 확정한 전후 사실을 기록한 글.
남북국시대 때, 시독한림랑 겸 숭문대서서원직학사를 역임한 통일신라의 문신.
박옹 (朴邕)
남북국시대 때, 시독한림랑 겸 숭문대서서원직학사를 역임한 통일신라의 문신.
신라 헌강왕 때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지은 격서.
격황소서 (檄黃巢書)
신라 헌강왕 때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지은 격서.
귀신사는 전라북도 김제시 모악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 시 명칭은 국신사(國信寺)로 화엄십찰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귀신사로 개명된 시기와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9세기 초에 귀신사로 불렸다. 고려시대에 원명국사가 중창하여 고려 말까지 번성하였다. 15세기 중후반에는 폐쇄되었으나 16세기 중반 사세를 회복하였고,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으나 17세기에 중창하였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과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인 삼층석탑, 승탑, 석수(石獸) 등의 문화재가 있다.
귀신사 (歸信寺)
귀신사는 전라북도 김제시 모악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 시 명칭은 국신사(國信寺)로 화엄십찰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귀신사로 개명된 시기와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9세기 초에 귀신사로 불렸다. 고려시대에 원명국사가 중창하여 고려 말까지 번성하였다. 15세기 중후반에는 폐쇄되었으나 16세기 중반 사세를 회복하였고,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으나 17세기에 중창하였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과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인 삼층석탑, 승탑, 석수(石獸) 등의 문화재가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최치원(崔致遠)과 관련된 서원. 교육시설.
정읍 무성서원 (井邑 武城書院)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최치원(崔致遠)과 관련된 서원. 교육시설.
신라시대 신분계층의 하나.
득난 (得難)
신라시대 신분계층의 하나.
신라 말기에 최치원이 지은 한시(漢詩).
강남녀 (江南女)
신라 말기에 최치원이 지은 한시(漢詩).
『계원필경』은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의 시문집(詩文集)이다. 최치원은 당 고변(高騈)의 휘하에 4년여 동안 종군할 때 1만여 수의 시문을 지었는데, 신라로 귀국한 뒤 그가 직접 종군 당시 시문을 선별하여 20권으로 편찬하여 50수의 시와 320편의 문을 수록하였다. 최치원의 당나라 종사관 시절 대표 저작이며,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문집이다.
계원필경 (桂苑筆耕)
『계원필경』은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의 시문집(詩文集)이다. 최치원은 당 고변(高騈)의 휘하에 4년여 동안 종군할 때 1만여 수의 시문을 지었는데, 신라로 귀국한 뒤 그가 직접 종군 당시 시문을 선별하여 20권으로 편찬하여 50수의 시와 320편의 문을 수록하였다. 최치원의 당나라 종사관 시절 대표 저작이며,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문집이다.
『수이전』은 신라 말기 최치원(崔致遠)에 의해 편찬되고 박인량(朴寅亮), 김척명(金陟明)에 의해 증보·개작된 설화집이다. 현재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일문(逸文)이 『삼국유사(三國遺事)』,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비롯하여 여러 서적에 흩어져 수록되어 있다. 내용상 중복되는 것을 제외하면 12편이 전하며, 형식상으로도 원본 그대로는 아니지만 『수이전』 일문을 통해 신라 시대 초기 서사 문학을 확인할 수 있다.
수이전 (殊異傳)
『수이전』은 신라 말기 최치원(崔致遠)에 의해 편찬되고 박인량(朴寅亮), 김척명(金陟明)에 의해 증보·개작된 설화집이다. 현재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일문(逸文)이 『삼국유사(三國遺事)』,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비롯하여 여러 서적에 흩어져 수록되어 있다. 내용상 중복되는 것을 제외하면 12편이 전하며, 형식상으로도 원본 그대로는 아니지만 『수이전』 일문을 통해 신라 시대 초기 서사 문학을 확인할 수 있다.
숙위학생은 통일신라 때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익히게 하려고 당나라 국자감에 파견한 유학생이다. 유학승(留學僧)과 함께 신라 대당 외교의 상징이다. 이들은 당 중심의 국제 질서를 인용하면서, 인적 · 물적 교류를 활발히 전개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신라 고유 문화와 제도를 당은 물론 주변 국가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다만, 신라 골품제 사회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능력과 경험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국가에서 발휘하게 되었다.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 견당유학생(遣唐留學生)이라고도 한다.
숙위학생 (宿衛學生)
숙위학생은 통일신라 때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익히게 하려고 당나라 국자감에 파견한 유학생이다. 유학승(留學僧)과 함께 신라 대당 외교의 상징이다. 이들은 당 중심의 국제 질서를 인용하면서, 인적 · 물적 교류를 활발히 전개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신라 고유 문화와 제도를 당은 물론 주변 국가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다만, 신라 골품제 사회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능력과 경험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국가에서 발휘하게 되었다.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 견당유학생(遣唐留學生)이라고도 한다.
고소설은 조선시대에 창작된 소설을 가리키는 국문학 용어이다. 고전소설이라고도 한다. 옛것이라는 의미로 ‘고’ 혹은 ‘고전’을 붙여서, 새롭게 출현한 신소설·현대소설과 구분한다. 고소설은 필사본과 방각본 형태로 유통되었고 일제강점기에 구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이본마다 내용 차이가 있다. 패설·고담·이야기책 등 다양한 이칭이 있었으며, 망실된 작품까지 감안하면 1,500여 종이 창작되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고소설의 시초는 통일신라 말에 창작된 「최치원」으로 보는 시각과 조선 초기에 김시습이 쓴 「금오신화」로 보는 시각이 있다.
고소설 (古小說)
고소설은 조선시대에 창작된 소설을 가리키는 국문학 용어이다. 고전소설이라고도 한다. 옛것이라는 의미로 ‘고’ 혹은 ‘고전’을 붙여서, 새롭게 출현한 신소설·현대소설과 구분한다. 고소설은 필사본과 방각본 형태로 유통되었고 일제강점기에 구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이본마다 내용 차이가 있다. 패설·고담·이야기책 등 다양한 이칭이 있었으며, 망실된 작품까지 감안하면 1,500여 종이 창작되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고소설의 시초는 통일신라 말에 창작된 「최치원」으로 보는 시각과 조선 초기에 김시습이 쓴 「금오신화」로 보는 시각이 있다.
882년(헌강왕 8)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 소의(昭義)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쓴 재사(齋詞).
고소의복야재사 (故昭義僕射齋詞)
882년(헌강왕 8)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 소의(昭義)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쓴 재사(齋詞).
서학은 통일신라시기에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선진학술과 사상을 배우고 익히던 행위이다. 서학이라는 용어는 신라 하대에 최치원이 처음 사용했으며 ‘서(西)’는 중국을 가리킨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나 송나라로 신라 하대에는 서학이 크게 유행하였다. 서학활동은 선종을 공부하려는 구법승과 골품제로 사회적 진출에 제약을 받던 6두품 출신의 도당유학생이 많았다. 신라는 서학을 통해 음양학·병법·기술학 등을 익혔다. 신라의 정치·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신라의 문화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어 하나의 체계적인 학문분야로 성립하지는 못하였다.
서학 (西學)
서학은 통일신라시기에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선진학술과 사상을 배우고 익히던 행위이다. 서학이라는 용어는 신라 하대에 최치원이 처음 사용했으며 ‘서(西)’는 중국을 가리킨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나 송나라로 신라 하대에는 서학이 크게 유행하였다. 서학활동은 선종을 공부하려는 구법승과 골품제로 사회적 진출에 제약을 받던 6두품 출신의 도당유학생이 많았다. 신라는 서학을 통해 음양학·병법·기술학 등을 익혔다. 신라의 정치·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신라의 문화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어 하나의 체계적인 학문분야로 성립하지는 못하였다.
신시도는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옥도면 신시도리에 있었던 섬이다. 신시도는 고군산군도 24개 섬 중 가장 큰 섬이었으나, 2010년 이후 새만금 방조제(1991년~2010년)에 의해서 육지와 연결되었다. 신시도의 북쪽에는 야미도와 비응도, 남쪽에는 비안도, 동쪽은 새만금 내부, 서쪽에는 무녀도, 선유도, 대장도, 관리도가 있다. 2010년 새만금 방조제가 완성되면서 북쪽의 비응도 및 야미도 그리고 남쪽으로는 가력도 및 부안군 변산면과 연결되었다. 비응도까지는 14km이며, 새만금 방조제의 부안쪽 방향에는 신시배수갑문이 있다.
신시도 (新侍島)
신시도는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옥도면 신시도리에 있었던 섬이다. 신시도는 고군산군도 24개 섬 중 가장 큰 섬이었으나, 2010년 이후 새만금 방조제(1991년~2010년)에 의해서 육지와 연결되었다. 신시도의 북쪽에는 야미도와 비응도, 남쪽에는 비안도, 동쪽은 새만금 내부, 서쪽에는 무녀도, 선유도, 대장도, 관리도가 있다. 2010년 새만금 방조제가 완성되면서 북쪽의 비응도 및 야미도 그리고 남쪽으로는 가력도 및 부안군 변산면과 연결되었다. 비응도까지는 14km이며, 새만금 방조제의 부안쪽 방향에는 신시배수갑문이 있다.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등운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등운산 고운사 (騰雲山 孤雲寺)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등운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는 894년(진성왕 8)에 신라의 최치원이 진성왕에게 올린 사회개혁안이다. 6두품 유학 지식인을 중심으로 신라 왕실의 안녕과 신라 국가의 위상을 강조한 존왕적 정치 이념을 담았다. 그러나 왕권이 이미 약화된 채 진골 세력이 거세게 반발하고 호족 세력이 지방 곳곳에서 성장한 상황에서 실현되기에는 버거웠다. 후삼국 시기 사회 혼란 수습 요구가 부각되면서, 최치원을 계승한 최언위나 최승로 등 신라 출신 유학 지식인에 의해 강조되어 고려의 국가 체제 정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시무십여조 (時務十餘條)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는 894년(진성왕 8)에 신라의 최치원이 진성왕에게 올린 사회개혁안이다. 6두품 유학 지식인을 중심으로 신라 왕실의 안녕과 신라 국가의 위상을 강조한 존왕적 정치 이념을 담았다. 그러나 왕권이 이미 약화된 채 진골 세력이 거세게 반발하고 호족 세력이 지방 곳곳에서 성장한 상황에서 실현되기에는 버거웠다. 후삼국 시기 사회 혼란 수습 요구가 부각되면서, 최치원을 계승한 최언위나 최승로 등 신라 출신 유학 지식인에 의해 강조되어 고려의 국가 체제 정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는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봉암사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지증대사 도헌의 탑비이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는 882년에 입적한 도헌을 현창하기 위해 893년에 최치원이 비문을 작성하였고, 924년에 비를 건립하였는데 분황사 승려 혜강이 비문을 쓰고 새겼다. 이 탑비는 지증대사의 행적을 전할 뿐 아니라 신라 불교 공인 시기 및 선종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는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봉암사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지증대사 도헌의 탑비이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는 882년에 입적한 도헌을 현창하기 위해 893년에 최치원이 비문을 작성하였고, 924년에 비를 건립하였는데 분황사 승려 혜강이 비문을 쓰고 새겼다. 이 탑비는 지증대사의 행적을 전할 뿐 아니라 신라 불교 공인 시기 및 선종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발원문(發願文).
봉위헌강대왕결화엄경사원문 (奉爲獻康大王結華嚴經社願文)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발원문(發願文).
삼국시대 신라에서 연주된 가야금곡.
사자기 (獅子伎)
삼국시대 신라에서 연주된 가야금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