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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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7년에 태어나 1990년에 사망했다. 20세 때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활동하다가 신규식·신익희 등의 권유로 영국에 유학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하여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대립했다. 미군정청·이승만정부에도 참여했으나 한국전쟁 중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과 결별했다. 4·19 이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5·16군사정변으로 하야했다.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에게 15만 7천표 차이로 패배하고 이후 야권 지도자로서 민주화운동에 공헌했다.
윤보선 (尹潽善)
윤보선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7년에 태어나 1990년에 사망했다. 20세 때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활동하다가 신규식·신익희 등의 권유로 영국에 유학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하여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대립했다. 미군정청·이승만정부에도 참여했으나 한국전쟁 중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과 결별했다. 4·19 이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5·16군사정변으로 하야했다.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에게 15만 7천표 차이로 패배하고 이후 야권 지도자로서 민주화운동에 공헌했다.
석유파동은 두 차례에 걸친 석유 공급 부족과 석유 가격 폭등으로 세계 경제가 큰 혼란과 어려움을 겪은 일이다. 1973년부터 1974년에 이르는 중동 전쟁 당시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 무기화 정책 실행,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이란 혁명으로 인한 석유 생산의 대폭 감축으로 석유의 공급이 부족해지자, 국제 석유 가격이 급상승하고, 그 결과 전 세계가 경제적 위기와 혼란을 겪었다. 오일쇼크 또는 유류파동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도 불황 속 물가 상승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고, 성장률 둔화, 무역수지 악화, 외채 폭증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석유파동 (石油波動)
석유파동은 두 차례에 걸친 석유 공급 부족과 석유 가격 폭등으로 세계 경제가 큰 혼란과 어려움을 겪은 일이다. 1973년부터 1974년에 이르는 중동 전쟁 당시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 무기화 정책 실행,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이란 혁명으로 인한 석유 생산의 대폭 감축으로 석유의 공급이 부족해지자, 국제 석유 가격이 급상승하고, 그 결과 전 세계가 경제적 위기와 혼란을 겪었다. 오일쇼크 또는 유류파동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도 불황 속 물가 상승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고, 성장률 둔화, 무역수지 악화, 외채 폭증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아시아 중남부 아라비아반도에 있는 왕국.
사우디아라비아 (Saudi Arabia)
아시아 중남부 아라비아반도에 있는 왕국.
문체반정은 조선 후기 정조 때에 유행한 한문문체를 개혁하여 순정고문으로 환원시키려던 정책이다. 문체순정, 문체파동, 비변문체, 문체지교정, 귀정이라고도 한다. 정조 당시는 패관잡기나 명말청초 중국 문인들의 문집에 영향을 받아 개성주의에 입각한 참신한 문체가 크게 유행하였다. 정조는 이를 배격하고 순정한 고문의 문풍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불순한 문체의 근원이 박지원과 그의 저작인 『열하일기』에 있다고 보고, 박지원에게 순정한 고문을 지어 바치도록 하였다. 또한 고문의 모범을 제시하기 위해 『주자선통(朱子選統)』, 『팔자백선(八子百選)』 등을 출간하였다.
문체반정 (文體反正)
문체반정은 조선 후기 정조 때에 유행한 한문문체를 개혁하여 순정고문으로 환원시키려던 정책이다. 문체순정, 문체파동, 비변문체, 문체지교정, 귀정이라고도 한다. 정조 당시는 패관잡기나 명말청초 중국 문인들의 문집에 영향을 받아 개성주의에 입각한 참신한 문체가 크게 유행하였다. 정조는 이를 배격하고 순정한 고문의 문풍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불순한 문체의 근원이 박지원과 그의 저작인 『열하일기』에 있다고 보고, 박지원에게 순정한 고문을 지어 바치도록 하였다. 또한 고문의 모범을 제시하기 위해 『주자선통(朱子選統)』, 『팔자백선(八子百選)』 등을 출간하였다.
이용문은 해방 이후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 수도사단장, 남부지구 경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이다. 1916년에 태어나 1953년에 사망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주둔 참모본부인 대본영에서 근무하였다. 남방전선으로 전속되었다가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현지인의 도움으로 풀려나 귀국하였다. 귀국 후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48년 육사 제8기 특대생으로 소령에 임관하였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군의 중립을 내세우며 병력 차출 명령을 거부하였다가 수도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1953년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지휘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이용문 (李龍文)
이용문은 해방 이후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 수도사단장, 남부지구 경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이다. 1916년에 태어나 1953년에 사망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주둔 참모본부인 대본영에서 근무하였다. 남방전선으로 전속되었다가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현지인의 도움으로 풀려나 귀국하였다. 귀국 후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48년 육사 제8기 특대생으로 소령에 임관하였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군의 중립을 내세우며 병력 차출 명령을 거부하였다가 수도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1953년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지휘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장석윤은 일제강점기 때, 미국 전략첩보국(OSS) 소속으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후, 내무부 차관, 민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1904년 출생하여 2004년 사망했다. 1924년 뉴욕에서 처음 이승만을 대면하고 그의 추천으로 태평양전쟁 때 미국 전략첩보국 소속으로 활동했다. 1950년 내무부 치안국장에 기용되어 보도연맹 사건의 책임자가 되었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국도신문』을 인수해, 1951년 2월 1일부터 신문을 속간했다. 1951년 제7대 내무부 차관에 임명, 1954년(3대), 1958년(4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장석윤 (張錫潤)
장석윤은 일제강점기 때, 미국 전략첩보국(OSS) 소속으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후, 내무부 차관, 민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1904년 출생하여 2004년 사망했다. 1924년 뉴욕에서 처음 이승만을 대면하고 그의 추천으로 태평양전쟁 때 미국 전략첩보국 소속으로 활동했다. 1950년 내무부 치안국장에 기용되어 보도연맹 사건의 책임자가 되었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국도신문』을 인수해, 1951년 2월 1일부터 신문을 속간했다. 1951년 제7대 내무부 차관에 임명, 1954년(3대), 1958년(4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71년, 1988년, 1993년, 2003년 등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난 사법부의 독립 보장과 개혁을 요구하는 현직 판사들의 집단행동.
사법파동 (司法波動)
1971년, 1988년, 1993년, 2003년 등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난 사법부의 독립 보장과 개혁을 요구하는 현직 판사들의 집단행동.
해방 이후 대법원장,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
민복기 (閔復基)
해방 이후 대법원장,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원내총무,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김진만 (金振晩)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원내총무,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해방 이후 대법원판사, 헌법위원, 대법원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
유태흥 (兪泰興)
해방 이후 대법원판사, 헌법위원, 대법원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
윤택중은 단국대학교 학장, 문교부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교육자이다. 1913년 전라북도 익산군 출생으로, 중앙고보 재학 중 제2회 전조선 남녀전문학생토론대회에서 개회사를 발표했다. 1943년 일본 주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으며, 해방 직후 고려청년당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50년 익산을 선거구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1년 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실각했다. 이후 민중당, 신한당, 민주통일당에서 활동하며 정치 활동을 지속했으며, 민족문화 보존과 민족사 바로 찾기에 힘썼다. 2002년 88세로 사망했다.
윤택중 (尹宅重)
윤택중은 단국대학교 학장, 문교부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교육자이다. 1913년 전라북도 익산군 출생으로, 중앙고보 재학 중 제2회 전조선 남녀전문학생토론대회에서 개회사를 발표했다. 1943년 일본 주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으며, 해방 직후 고려청년당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50년 익산을 선거구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1년 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실각했다. 이후 민중당, 신한당, 민주통일당에서 활동하며 정치 활동을 지속했으며, 민족문화 보존과 민족사 바로 찾기에 힘썼다. 2002년 88세로 사망했다.
개헌안부결반대운동(改憲案否決反對運動)은 1952년에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이승만 정부가 국회를 압박하여 결과를 번복하기 위해, 관제 조직들을 동원하여 전개한 대중집회와 시위이다. 1952년 1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큰 표 차이로 부결되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번복하기 위해 관제 조직들을 동원하여 국회의원 소환, 국회 해산 등을 주장하는 집회와 시위를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1952년 5월 25일 임시 수도 부산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는 부산정치파동으로 이어졌다.
개헌안 부결 반대운동 (改憲案 否決 反對運動)
개헌안부결반대운동(改憲案否決反對運動)은 1952년에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이승만 정부가 국회를 압박하여 결과를 번복하기 위해, 관제 조직들을 동원하여 전개한 대중집회와 시위이다. 1952년 1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큰 표 차이로 부결되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번복하기 위해 관제 조직들을 동원하여 국회의원 소환, 국회 해산 등을 주장하는 집회와 시위를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1952년 5월 25일 임시 수도 부산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는 부산정치파동으로 이어졌다.
제2대 국회의원, 김천시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여영복 (呂永複)
제2대 국회의원, 김천시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은 1960년 4월 26일 이전에 특정 지위를 이용하여 현저한 반민주 행위를 한 자의 공민권을 제한하기 위하여 제정한 법률이다. 현저한 반민주 행위 의제와 심사 대상, 공민권 제한 기간을 포함한 전문 15조와 부칙으로 구성되었다. 이 법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법 제정의 목적을 실현하지 못하고 1962년 3월 16일 폐지되었다.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 (反民主行爲者公民權制限法)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은 1960년 4월 26일 이전에 특정 지위를 이용하여 현저한 반민주 행위를 한 자의 공민권을 제한하기 위하여 제정한 법률이다. 현저한 반민주 행위 의제와 심사 대상, 공민권 제한 기간을 포함한 전문 15조와 부칙으로 구성되었다. 이 법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법 제정의 목적을 실현하지 못하고 1962년 3월 16일 폐지되었다.
컬러텔레비전 방영은 1980년에 불황 타개를 위해 컬러텔레비전의 방송을 전격적으로 허가한 조치이다. 한국의 전자 산업은 1970년대에 급속히 성장하다가 1980년에 13.1%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1980년 11월 10일에 개최된 국무회의에서 12월 1일을 기해 컬러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한다고 결정했다. 컬러텔레비전의 방영으로 한국 전자 산업은 다시 도약할 수 있었고, 우리 사회에서는 ‘컬러화’의 선풍이 불기 시작했다.
컬러텔레비전 방영 (color television 放映)
컬러텔레비전 방영은 1980년에 불황 타개를 위해 컬러텔레비전의 방송을 전격적으로 허가한 조치이다. 한국의 전자 산업은 1970년대에 급속히 성장하다가 1980년에 13.1%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1980년 11월 10일에 개최된 국무회의에서 12월 1일을 기해 컬러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한다고 결정했다. 컬러텔레비전의 방영으로 한국 전자 산업은 다시 도약할 수 있었고, 우리 사회에서는 ‘컬러화’의 선풍이 불기 시작했다.
민중자결단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 통과와 국회 해산을 주장한 친이승만 계열의 단체이다. 1952년 5월 24일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 민중자결선포대회를 개최하는 등 각종 시위와 폭력 행동에 앞장섰다. 1952년 제2대 정부통령선거에서는 이승만의 재출마운동을 벌였고, 1954년 제3대 총선을 앞두고 이승만이 추진하는 개헌운동에도 동원되었다.
민중자결단 (民衆自決團)
민중자결단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 통과와 국회 해산을 주장한 친이승만 계열의 단체이다. 1952년 5월 24일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 민중자결선포대회를 개최하는 등 각종 시위와 폭력 행동에 앞장섰다. 1952년 제2대 정부통령선거에서는 이승만의 재출마운동을 벌였고, 1954년 제3대 총선을 앞두고 이승만이 추진하는 개헌운동에도 동원되었다.
온대저기압은 한대전선대에서 발달한 파동이 편서풍을 타고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며 성장하여 발달한 저기압이다. 열대저기압과 구분하여 온대저기압 또는 중위도저기압이라고 한다. 온대저기압은 고기압보다 규모가 작지만, 한반도는 대부분 하나의 저기압에 영향을 받는다.
온대저기압 (溫帶低氣壓)
온대저기압은 한대전선대에서 발달한 파동이 편서풍을 타고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며 성장하여 발달한 저기압이다. 열대저기압과 구분하여 온대저기압 또는 중위도저기압이라고 한다. 온대저기압은 고기압보다 규모가 작지만, 한반도는 대부분 하나의 저기압에 영향을 받는다.
중동 건설붐은 1973년의 석유파동(石油波動) 이후 한국 건설업체들이 중동 국가들의 오일 달러를 벌기 위해 그 건설시장에 진출하여 수많은 공사를 수주하고 성공적으로 완수한 사건이다. 1973년의 제1차 석유파동 이후,사우디 등 중동 국가들이 풍부한 오일 달러로 사회간접자본의 건설에 나섰는데 한국 건설업체들이 그 국가들의 도로, 항만, 주택, 플랜트 건설 시장에 적극 참여하여 수많은 공사를 수주하고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외화를 획득하고 인력 및 기술 개발과 국제 경영 노하우 획득, 국가 브랜드 상승의 성과를 거두었다.
중동 건설붐 (中東 建設boom)
중동 건설붐은 1973년의 석유파동(石油波動) 이후 한국 건설업체들이 중동 국가들의 오일 달러를 벌기 위해 그 건설시장에 진출하여 수많은 공사를 수주하고 성공적으로 완수한 사건이다. 1973년의 제1차 석유파동 이후,사우디 등 중동 국가들이 풍부한 오일 달러로 사회간접자본의 건설에 나섰는데 한국 건설업체들이 그 국가들의 도로, 항만, 주택, 플랜트 건설 시장에 적극 참여하여 수많은 공사를 수주하고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외화를 획득하고 인력 및 기술 개발과 국제 경영 노하우 획득, 국가 브랜드 상승의 성과를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