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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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의 정변은 고려 전기 목종 때 강조가 일으킨 정변이다. 강조가 1009년(목종 12) 목종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고 대량원군(大良院君), 즉 현종을 옹립한 사건이다. 강조는 목종을 폐하여 '양국공(讓國公)'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어 목종을 지키게 하는 한편, 김치양(金致陽)과 그의 아들 및 참소를 일삼던 유행간 등 7인을 잡아 베고 그 여당(餘黨)과 천추태후(千秋太后)의 친속(親屬) 30여 인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강조의 정변 (康兆의 政變)
강조의 정변은 고려 전기 목종 때 강조가 일으킨 정변이다. 강조가 1009년(목종 12) 목종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고 대량원군(大良院君), 즉 현종을 옹립한 사건이다. 강조는 목종을 폐하여 '양국공(讓國公)'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어 목종을 지키게 하는 한편, 김치양(金致陽)과 그의 아들 및 참소를 일삼던 유행간 등 7인을 잡아 베고 그 여당(餘黨)과 천추태후(千秋太后)의 친속(親屬) 30여 인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갑인예송은 1674년(현종 15) 효종 왕비 인선왕후의 국상에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예송 사건이다. 인선왕후가 장자의 부인인가 차자의 부인인가에 따라 자의대비는 기년복 혹은 대공복을 입어야 했는데, 이는 효종이 장자인가 차자인가 하는 효종의 종통과도 연관된 문제였다. 현종은 효종의 종통을 문란하게 만든 서인의 대공복 논리에 분노하여 복제를 기년복으로 개정하고 서인을 처벌하였다. 복제 개정 후 한 달여 만에 현종이 승하하자 14세의 나이에 즉위한 숙종은 장례 후 과감히 서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남인을 등용하여 정국을 개편했다.
갑인예송 (甲寅禮訟)
갑인예송은 1674년(현종 15) 효종 왕비 인선왕후의 국상에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예송 사건이다. 인선왕후가 장자의 부인인가 차자의 부인인가에 따라 자의대비는 기년복 혹은 대공복을 입어야 했는데, 이는 효종이 장자인가 차자인가 하는 효종의 종통과도 연관된 문제였다. 현종은 효종의 종통을 문란하게 만든 서인의 대공복 논리에 분노하여 복제를 기년복으로 개정하고 서인을 처벌하였다. 복제 개정 후 한 달여 만에 현종이 승하하자 14세의 나이에 즉위한 숙종은 장례 후 과감히 서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남인을 등용하여 정국을 개편했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대장경판이다.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가 소장하고 있다. 몽골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에서 대장경판을 새기게 되었다. 판각의 매수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수록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1237년 판각을 시작하여 1248년에 대장 목록을 마지막으로 새겼다. 대장경 가운데 내용이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대장경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962년에 국보, 1995년 세계문화유산,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대장경판이다.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가 소장하고 있다. 몽골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에서 대장경판을 새기게 되었다. 판각의 매수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수록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1237년 판각을 시작하여 1248년에 대장 목록을 마지막으로 새겼다. 대장경 가운데 내용이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대장경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962년에 국보, 1995년 세계문화유산,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다.
『칠대실록(七代實錄)』은 고려 전기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7대에 걸친 역사 기록이다. 원래 실록이 있었으나 현종 대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져 다시 편찬하였는데, 이를 『칠대사적(七代事跡)』이라 하였다. 편찬에 참여한 자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면서 황주량(黃周亮)에 의해 주도되어 황주량의 저서처럼 되어 있다.
칠대실록 (七代實錄)
『칠대실록(七代實錄)』은 고려 전기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7대에 걸친 역사 기록이다. 원래 실록이 있었으나 현종 대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져 다시 편찬하였는데, 이를 『칠대사적(七代事跡)』이라 하였다. 편찬에 참여한 자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면서 황주량(黃周亮)에 의해 주도되어 황주량의 저서처럼 되어 있다.
명성왕후는 조선 후기 제18대 현종의 왕비이며, 숙종의 어머니이다. 며느리 인경왕후가 사망하자 신하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7개월 만에 계비 인현왕후를 맞아들였으며, 당시 숙종의 은총을 받던 궁녀 장씨[희빈 장씨]를 경계하여 궁궐 밖으로 내보내는 등 대비로서의 역할을 확실히 하였다.
명성왕후 (明聖王后)
명성왕후는 조선 후기 제18대 현종의 왕비이며, 숙종의 어머니이다. 며느리 인경왕후가 사망하자 신하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7개월 만에 계비 인현왕후를 맞아들였으며, 당시 숙종의 은총을 받던 궁녀 장씨[희빈 장씨]를 경계하여 궁궐 밖으로 내보내는 등 대비로서의 역할을 확실히 하였다.
구주대첩(龜州大捷)은 1019년(현종 10) 고려에 침입한 거란군을 구주에서 크게 격파한 전투이다. 구주는 993년(성종 12) 10월 거란의 제1차 침입 후 체결된 강화조약에서 서희(徐熙)의 외교적인 수완으로 고려의 점유를 인정받은 청천강 이북에서 압록강 입구까지의 강동지방에 설치된 행정 구역인 강동육주의 하나였다. 1018년(현종 9) 12월 소배압(蕭排押)을 총지휘관으로 한 거란의 제3차 침입 때, 10만의 거란대군을 상원수 강감찬(姜邯贊) 등이 구주에서 크게 무찔러 거란군의 전의를 완전히 잃게 한 전쟁을 말한다.
구주대첩 (龜州大捷)
구주대첩(龜州大捷)은 1019년(현종 10) 고려에 침입한 거란군을 구주에서 크게 격파한 전투이다. 구주는 993년(성종 12) 10월 거란의 제1차 침입 후 체결된 강화조약에서 서희(徐熙)의 외교적인 수완으로 고려의 점유를 인정받은 청천강 이북에서 압록강 입구까지의 강동지방에 설치된 행정 구역인 강동육주의 하나였다. 1018년(현종 9) 12월 소배압(蕭排押)을 총지휘관으로 한 거란의 제3차 침입 때, 10만의 거란대군을 상원수 강감찬(姜邯贊) 등이 구주에서 크게 무찔러 거란군의 전의를 완전히 잃게 한 전쟁을 말한다.
목종은 고려 전기 고려의 제7대 왕이다. 17세에 즉위하여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였다. 또한 과거시행법을 정비하였으며, 서경(西京)을 중시하였다. 하지만 천추태후(天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의 영향력을 제어하지 못하였다. 김치양의 난으로 대량원군(大良院君)을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강조(康兆)에게 입위를 명령하였지만, 오히려 강조에게 시해되었다.
목종 (穆宗)
목종은 고려 전기 고려의 제7대 왕이다. 17세에 즉위하여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였다. 또한 과거시행법을 정비하였으며, 서경(西京)을 중시하였다. 하지만 천추태후(天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의 영향력을 제어하지 못하였다. 김치양의 난으로 대량원군(大良院君)을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강조(康兆)에게 입위를 명령하였지만, 오히려 강조에게 시해되었다.
조선후기 제19대 숙종의 왕비.
인경왕후 (仁敬王后)
조선후기 제19대 숙종의 왕비.
포항 장기읍성(浦項 長鬐邑城)은 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있는 조선 세종 21년(1439)에 석축으로 개축한 읍성이다. 본래 고려 현종 때 토성으로 축조하여 장기 지역의 치소성으로 사용하였으나 잦은 동여진 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조선 개국 후 석축성으로 개축하였다. 성의 둘레는 3,664척, 높이 12척이다. 샘이 두 곳, 못이 두 곳으로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았다고 하며, 군창도 있었다고 전한다. 1991년 이후 6차례 이상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체성과 옹성문지, 수구 등에 대한 복원 공사가 이루어졌다.
포항 장기읍성 (浦項 長鬐邑城)
포항 장기읍성(浦項 長鬐邑城)은 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있는 조선 세종 21년(1439)에 석축으로 개축한 읍성이다. 본래 고려 현종 때 토성으로 축조하여 장기 지역의 치소성으로 사용하였으나 잦은 동여진 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조선 개국 후 석축성으로 개축하였다. 성의 둘레는 3,664척, 높이 12척이다. 샘이 두 곳, 못이 두 곳으로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았다고 하며, 군창도 있었다고 전한다. 1991년 이후 6차례 이상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체성과 옹성문지, 수구 등에 대한 복원 공사가 이루어졌다.
고려전기 제1대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왕자.
안종 (安宗)
고려전기 제1대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왕자.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 후기 18대 현종과 비의 능침인 숭릉에 건립한 정자각이다. 1674년에 현종의 능을 조성하며 제사 건물인 정자각도 같이 건립했다.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한 팔작지붕으로, 규모는 정전 5칸, 배위청 3칸의 전체 8칸이다. 8칸 정자각은 숭릉 외에도 현존하는 것으로 익릉, 휘릉, 의릉의 정자각이 있다. 그러나 이들 정자각은 지붕이 모두 맞배지붕이며 숭릉 정자각만이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숭릉 정자각은 창건 시의 모습을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17세기 정자각의 다양한 건물 유형을 확인할 수 있다.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 (九里 東九陵 崇陵 丁字閣)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 후기 18대 현종과 비의 능침인 숭릉에 건립한 정자각이다. 1674년에 현종의 능을 조성하며 제사 건물인 정자각도 같이 건립했다.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한 팔작지붕으로, 규모는 정전 5칸, 배위청 3칸의 전체 8칸이다. 8칸 정자각은 숭릉 외에도 현존하는 것으로 익릉, 휘릉, 의릉의 정자각이 있다. 그러나 이들 정자각은 지붕이 모두 맞배지붕이며 숭릉 정자각만이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숭릉 정자각은 창건 시의 모습을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17세기 정자각의 다양한 건물 유형을 확인할 수 있다.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월롱산(月籠山) 용상곡(龍床谷)에 있는 고려전기 제8대 현종이 창건한 사찰.
월롱산 용상사 (月籠山 龍床寺)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월롱산(月籠山) 용상곡(龍床谷)에 있는 고려전기 제8대 현종이 창건한 사찰.
고려전기 제8대 현종의 왕비.
원정왕후 (元貞王后)
고려전기 제8대 현종의 왕비.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은 『현종실록』을 추후에 수정한 역사서이다. 모두 28권 29책의 활자본으로, 조선시대 다른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현종실록』을 개수한 뒤에도 그대로 남겨놓아 당대의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현종개수실록 (顯宗改修實錄)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은 『현종실록』을 추후에 수정한 역사서이다. 모두 28권 29책의 활자본으로, 조선시대 다른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현종실록』을 개수한 뒤에도 그대로 남겨놓아 당대의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선릉은 북한 개성특급시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제8대 현종이 묻힌 왕릉이다. 1031년(현종 22) 5월 현종은 사후 개성부 송악산 선릉에 묻혔으나 조선시대에 이미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현재 선릉이 위치한 곳에는 3기의 능이 나란히 있는데, 선릉떼 3릉 중 1릉의 능제에서 고려 왕릉의 일반적인 4단을 엿볼 수 있다. 석물의 경우 병풍석에 십이지 신상이 새겨져 있고, 석수의 형태가 등 뒤 꼬리의 모습으로 사자형이며, 석인들이 양관 조복을 착용하는 등 고려 전기의 왕릉 양식이어서 현종 선릉으로 여겨진다.
선릉 (宣陵)
선릉은 북한 개성특급시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제8대 현종이 묻힌 왕릉이다. 1031년(현종 22) 5월 현종은 사후 개성부 송악산 선릉에 묻혔으나 조선시대에 이미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현재 선릉이 위치한 곳에는 3기의 능이 나란히 있는데, 선릉떼 3릉 중 1릉의 능제에서 고려 왕릉의 일반적인 4단을 엿볼 수 있다. 석물의 경우 병풍석에 십이지 신상이 새겨져 있고, 석수의 형태가 등 뒤 꼬리의 모습으로 사자형이며, 석인들이 양관 조복을 착용하는 등 고려 전기의 왕릉 양식이어서 현종 선릉으로 여겨진다.
조선후기 병자호란 이후 세자 호위병으로 청나라에 따라간 무신.
오효성 (吳孝誠)
조선후기 병자호란 이후 세자 호위병으로 청나라에 따라간 무신.
고려전기 제8대 현종의 제4왕비.
원혜태후 (元惠太后)
고려전기 제8대 현종의 제4왕비.
고려전기 제8대 현종의 제6왕비.
원목왕후 (元穆王后)
고려전기 제8대 현종의 제6왕비.
고려의 제9대 왕, 덕종의 왕비.
경성왕후 (敬成王后)
고려의 제9대 왕, 덕종의 왕비.
숭릉(崇陵)은 조선 제18대 국왕인 현종과 명성왕후 청풍김씨의 쌍릉 합장릉이다. 1674년에 조성한 현종 숭릉의 돌거리는 효종의 옛 영릉 돌거리를 재사용하였으며, 이는 조선왕릉 중 돌거리 재사용의 첫 사례이다. 숭릉 정자각은 팔작지붕의 8칸 건물로서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이라는 명칭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숭릉은 구리 동구릉 내에 있다.
숭릉 (崇陵)
숭릉(崇陵)은 조선 제18대 국왕인 현종과 명성왕후 청풍김씨의 쌍릉 합장릉이다. 1674년에 조성한 현종 숭릉의 돌거리는 효종의 옛 영릉 돌거리를 재사용하였으며, 이는 조선왕릉 중 돌거리 재사용의 첫 사례이다. 숭릉 정자각은 팔작지붕의 8칸 건물로서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이라는 명칭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숭릉은 구리 동구릉 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