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현종"
검색결과 총 42건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은 『현종실록』을 추후에 수정한 역사서이다. 모두 28권 29책의 활자본으로, 조선시대 다른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현종실록』을 개수한 뒤에도 그대로 남겨놓아 당대의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현종개수실록 (顯宗改修實錄)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은 『현종실록』을 추후에 수정한 역사서이다. 모두 28권 29책의 활자본으로, 조선시대 다른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현종실록』을 개수한 뒤에도 그대로 남겨놓아 당대의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현종실록』은 조선 제18대 국왕 현종(顯宗)의 재위 기간(1659년 5월~1674년 8월) 15년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이다. 1675년(숙종 1년)부터 1677년까지 북인계 남인이 주도하여 편찬하였다. 22권의 활자본이며 조선 실록의 하나로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현종실록 (顯宗實錄)
『현종실록』은 조선 제18대 국왕 현종(顯宗)의 재위 기간(1659년 5월~1674년 8월) 15년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이다. 1675년(숙종 1년)부터 1677년까지 북인계 남인이 주도하여 편찬하였다. 22권의 활자본이며 조선 실록의 하나로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강조는 고려 전기에 서북면도순검사, 중대사, 이부상서·참지정사, 행영도통사 등을 역임한 권신이다. 목종 때 서북면도순검사가 되었는데 당시 목종의 명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개경으로 진격하여 김치양 세력을 제거하고 현종을 왕위에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후 목종을 시해하여 권력을 장악했는데, 거란이 이를 구실로 1010년(현종 1) 침략하자 서북면 행영도통사가 되어 통주 삼수채에서 거란군과 싸워 몇 차례 승리했으나 이내 방심하다가 거란군에게 사로잡혔다. 그러나 거란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가 살해당하였다.
강조 (康兆)
강조는 고려 전기에 서북면도순검사, 중대사, 이부상서·참지정사, 행영도통사 등을 역임한 권신이다. 목종 때 서북면도순검사가 되었는데 당시 목종의 명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개경으로 진격하여 김치양 세력을 제거하고 현종을 왕위에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후 목종을 시해하여 권력을 장악했는데, 거란이 이를 구실로 1010년(현종 1) 침략하자 서북면 행영도통사가 되어 통주 삼수채에서 거란군과 싸워 몇 차례 승리했으나 이내 방심하다가 거란군에게 사로잡혔다. 그러나 거란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가 살해당하였다.
강조의 정변은 고려 전기 목종 때 강조가 일으킨 정변이다. 강조가 1009년(목종 12) 목종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고 대량원군(大良院君), 즉 현종을 옹립한 사건이다. 강조는 목종을 폐하여 '양국공(讓國公)'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어 목종을 지키게 하는 한편, 김치양(金致陽)과 그의 아들 및 참소를 일삼던 유행간 등 7인을 잡아 베고 그 여당(餘黨)과 천추태후(千秋太后)의 친속(親屬) 30여 인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강조의 정변 (康兆의 政變)
강조의 정변은 고려 전기 목종 때 강조가 일으킨 정변이다. 강조가 1009년(목종 12) 목종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고 대량원군(大良院君), 즉 현종을 옹립한 사건이다. 강조는 목종을 폐하여 '양국공(讓國公)'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어 목종을 지키게 하는 한편, 김치양(金致陽)과 그의 아들 및 참소를 일삼던 유행간 등 7인을 잡아 베고 그 여당(餘黨)과 천추태후(千秋太后)의 친속(親屬) 30여 인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조선후기 「설중귀려도」, 「달마도」, 「은사도」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김명국 (金明國)
조선후기 「설중귀려도」, 「달마도」, 「은사도」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목종은 고려 전기 고려의 제7대 왕이다. 17세에 즉위하여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였다. 또한 과거시행법을 정비하였으며, 서경(西京)을 중시하였다. 하지만 천추태후(天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의 영향력을 제어하지 못하였다. 김치양의 난으로 대량원군(大良院君)을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강조(康兆)에게 입위를 명령하였지만, 오히려 강조에게 시해되었다.
목종 (穆宗)
목종은 고려 전기 고려의 제7대 왕이다. 17세에 즉위하여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였다. 또한 과거시행법을 정비하였으며, 서경(西京)을 중시하였다. 하지만 천추태후(天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의 영향력을 제어하지 못하였다. 김치양의 난으로 대량원군(大良院君)을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강조(康兆)에게 입위를 명령하였지만, 오히려 강조에게 시해되었다.
고려 전기 강조의 정변 당시에,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왕으로 옹립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이후 거란의 침입에도 끝까지 현종을 호종한 문신.
김응인 (金應仁)
고려 전기 강조의 정변 당시에,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왕으로 옹립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이후 거란의 침입에도 끝까지 현종을 호종한 문신.
고려의 제9대 왕, 덕종의 왕비.
경성왕후 (敬成王后)
고려의 제9대 왕, 덕종의 왕비.
문종은 고려 전기 제1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46~1083년이며, 형인 제10대 왕 정종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형제 상속의 형태를 취해 왕위를 계승했다. 문종 재위기는 고려의 황금기라 할 정도로 문물제도가 크게 정비된 시기였다. 양반전시과가 다시 정비되고 관제가 개편되었으며, 백관의 서열과 녹과가 제정되는 등 지배체제 확립을 위한 정치·경제제도가 완비되었다. 형법 정비와 재면법 마련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발전이 있었다. 몇 차례 동여진의 침략도 모두 격퇴하고 여진과 대체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문종 (文宗)
문종은 고려 전기 제1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46~1083년이며, 형인 제10대 왕 정종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형제 상속의 형태를 취해 왕위를 계승했다. 문종 재위기는 고려의 황금기라 할 정도로 문물제도가 크게 정비된 시기였다. 양반전시과가 다시 정비되고 관제가 개편되었으며, 백관의 서열과 녹과가 제정되는 등 지배체제 확립을 위한 정치·경제제도가 완비되었다. 형법 정비와 재면법 마련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발전이 있었다. 몇 차례 동여진의 침략도 모두 격퇴하고 여진과 대체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덕종은 고려 전기 제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31년~1034년이다. 국자감시를 처음 실시하였고 고려실록 편찬 사업을 벌였다. 양반 및 군·한인의 전시과를 개정하였다. 거란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외교를 전개하였다. 억류한 고려 사신을 돌려 보낼 것을 요청하였고 거란이 압록강 동쪽에 쌓은 2성을 철거할 것도 요청하였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하정사 파견을 중단하였다. 한편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서북면 압록강 하구에서 동북면 도련포에 이르기까지 고려장성 축조를 시작하였다.
덕종 (德宗)
덕종은 고려 전기 제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31년~1034년이다. 국자감시를 처음 실시하였고 고려실록 편찬 사업을 벌였다. 양반 및 군·한인의 전시과를 개정하였다. 거란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외교를 전개하였다. 억류한 고려 사신을 돌려 보낼 것을 요청하였고 거란이 압록강 동쪽에 쌓은 2성을 철거할 것도 요청하였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하정사 파견을 중단하였다. 한편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서북면 압록강 하구에서 동북면 도련포에 이르기까지 고려장성 축조를 시작하였다.
강원도 춘천시 서면에 있는 조선후기 제18대 현종의 장인인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묘역.
김청풍 부원군 묘역 (金淸風 府院君 墓域)
강원도 춘천시 서면에 있는 조선후기 제18대 현종의 장인인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묘역.
숭릉(崇陵)은 조선 제18대 국왕인 현종과 명성왕후 청풍김씨의 쌍릉 합장릉이다. 1674년에 조성한 현종 숭릉의 돌거리는 효종의 옛 영릉 돌거리를 재사용하였으며, 이는 조선왕릉 중 돌거리 재사용의 첫 사례이다. 숭릉 정자각은 팔작지붕의 8칸 건물로서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이라는 명칭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숭릉은 구리 동구릉 내에 있다.
숭릉 (崇陵)
숭릉(崇陵)은 조선 제18대 국왕인 현종과 명성왕후 청풍김씨의 쌍릉 합장릉이다. 1674년에 조성한 현종 숭릉의 돌거리는 효종의 옛 영릉 돌거리를 재사용하였으며, 이는 조선왕릉 중 돌거리 재사용의 첫 사례이다. 숭릉 정자각은 팔작지붕의 8칸 건물로서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이라는 명칭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숭릉은 구리 동구릉 내에 있다.
고려전기 제1대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왕자.
안종 (安宗)
고려전기 제1대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왕자.
선릉은 북한 개성특급시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제8대 현종이 묻힌 왕릉이다. 1031년(현종 22) 5월 현종은 사후 개성부 송악산 선릉에 묻혔으나 조선시대에 이미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현재 선릉이 위치한 곳에는 3기의 능이 나란히 있는데, 선릉떼 3릉 중 1릉의 능제에서 고려 왕릉의 일반적인 4단을 엿볼 수 있다. 석물의 경우 병풍석에 십이지 신상이 새겨져 있고, 석수의 형태가 등 뒤 꼬리의 모습으로 사자형이며, 석인들이 양관 조복을 착용하는 등 고려 전기의 왕릉 양식이어서 현종 선릉으로 여겨진다.
선릉 (宣陵)
선릉은 북한 개성특급시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제8대 현종이 묻힌 왕릉이다. 1031년(현종 22) 5월 현종은 사후 개성부 송악산 선릉에 묻혔으나 조선시대에 이미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현재 선릉이 위치한 곳에는 3기의 능이 나란히 있는데, 선릉떼 3릉 중 1릉의 능제에서 고려 왕릉의 일반적인 4단을 엿볼 수 있다. 석물의 경우 병풍석에 십이지 신상이 새겨져 있고, 석수의 형태가 등 뒤 꼬리의 모습으로 사자형이며, 석인들이 양관 조복을 착용하는 등 고려 전기의 왕릉 양식이어서 현종 선릉으로 여겨진다.
조선후기 병자호란 이후 세자 호위병으로 청나라에 따라간 무신.
오효성 (吳孝誠)
조선후기 병자호란 이후 세자 호위병으로 청나라에 따라간 무신.
고려 전기에, 상서우복야, 참지정사, 판호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손관 (孫冠)
고려 전기에, 상서우복야, 참지정사, 판호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월롱산(月籠山) 용상곡(龍床谷)에 있는 고려전기 제8대 현종이 창건한 사찰.
월롱산 용상사 (月籠山 龍床寺)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월롱산(月籠山) 용상곡(龍床谷)에 있는 고려전기 제8대 현종이 창건한 사찰.
고려 전기에, 한림학사, 승지, 예부상서 등을 역임한 문신.
손몽주 (孫夢周)
고려 전기에, 한림학사, 승지, 예부상서 등을 역임한 문신.
왕가도는 고려 전기 치성공신과 수충창궐공신에 책록되고, 참지정사·문하시랑평장사·감수국사 등을 역임한 공신이자 문신이다. 본래 이름은 이자림이었는데, 중간에 이가도로 바꾸었다.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그는 김훈·최질 등을 제거하면서 현종과 밀착되어 딸을 원질귀비로 납비하였고, 치성공신에 책봉되었다. 나성을 축조한 공으로 다시 수충창궐공신에 책봉되고 왕씨를 사성 받으면서 왕가도라 하였다. 그 뒤에는 또 다른 딸을 납비하여 덕종의 후비 경목현비로 삼았다.
왕가도 (王可道)
왕가도는 고려 전기 치성공신과 수충창궐공신에 책록되고, 참지정사·문하시랑평장사·감수국사 등을 역임한 공신이자 문신이다. 본래 이름은 이자림이었는데, 중간에 이가도로 바꾸었다.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그는 김훈·최질 등을 제거하면서 현종과 밀착되어 딸을 원질귀비로 납비하였고, 치성공신에 책봉되었다. 나성을 축조한 공으로 다시 수충창궐공신에 책봉되고 왕씨를 사성 받으면서 왕가도라 하였다. 그 뒤에는 또 다른 딸을 납비하여 덕종의 후비 경목현비로 삼았다.
포항 장기읍성(浦項 長鬐邑城)은 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있는 조선 세종 21년(1439)에 석축으로 개축한 읍성이다. 본래 고려 현종 때 토성으로 축조하여 장기 지역의 치소성으로 사용하였으나 잦은 동여진 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조선 개국 후 석축성으로 개축하였다. 성의 둘레는 3,664척, 높이 12척이다. 샘이 두 곳, 못이 두 곳으로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았다고 하며, 군창도 있었다고 전한다. 1991년 이후 6차례 이상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체성과 옹성문지, 수구 등에 대한 복원 공사가 이루어졌다.
포항 장기읍성 (浦項 長鬐邑城)
포항 장기읍성(浦項 長鬐邑城)은 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있는 조선 세종 21년(1439)에 석축으로 개축한 읍성이다. 본래 고려 현종 때 토성으로 축조하여 장기 지역의 치소성으로 사용하였으나 잦은 동여진 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조선 개국 후 석축성으로 개축하였다. 성의 둘레는 3,664척, 높이 12척이다. 샘이 두 곳, 못이 두 곳으로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았다고 하며, 군창도 있었다고 전한다. 1991년 이후 6차례 이상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체성과 옹성문지, 수구 등에 대한 복원 공사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