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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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때 간도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간도 3·1운동 (間島 三一運動)
1919년 3·1운동 때 간도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1919년 3·1운동 때 평안북도 강계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강계 3·1운동 (江界 三一運動)
1919년 3·1운동 때 평안북도 강계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1919년 3·1운동 당시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송산 3·1운동 (松山 三一運動)
1919년 3·1운동 당시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김문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기자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3 · 1운동 당시 정주면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장편 창가 「고려사가(高麗寺歌)」를 저술하였다.
김문세 (金文世)
김문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기자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3 · 1운동 당시 정주면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장편 창가 「고려사가(高麗寺歌)」를 저술하였다.
김병조는 1919년 3 · 1운동에서 기독교계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한국독립운동사략』 상권을 저술하였다.
김병조 (金秉祚)
김병조는 1919년 3 · 1운동에서 기독교계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한국독립운동사략』 상권을 저술하였다.
김선두는 일제강점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서 평양 장로교계 3·1운동을 주동했던 목사이다. 1938년 8월경에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사 참배 결의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까지 건너가 활동했으나, 일제 경찰의 사전 검속으로 무산되었다.
김선두 (金善斗)
김선두는 일제강점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서 평양 장로교계 3·1운동을 주동했던 목사이다. 1938년 8월경에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사 참배 결의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까지 건너가 활동했으나, 일제 경찰의 사전 검속으로 무산되었다.
김성숙은 일제강점기 조선의용대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승려이다. 1898년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호는 운암(雲巖), 성숙(星淑)은 법명이다. 1916년 독립군에 가담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했다. 주요 독립운동 활동으로 3·1 운동 주도, 조선의열단 가담, 조선의용대 조직 및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역임 등이 있다. 광복 후 여운형과 좌우합작을 지지하였으며, 진보당사건(1955년)으로 큰 탄압을 받았다. 1969년 서거하였으며,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성숙 (金星淑)
김성숙은 일제강점기 조선의용대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승려이다. 1898년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호는 운암(雲巖), 성숙(星淑)은 법명이다. 1916년 독립군에 가담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했다. 주요 독립운동 활동으로 3·1 운동 주도, 조선의열단 가담, 조선의용대 조직 및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역임 등이 있다. 광복 후 여운형과 좌우합작을 지지하였으며, 진보당사건(1955년)으로 큰 탄압을 받았다. 1969년 서거하였으며,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곽상훈은 동래3·1운동 참가, 신간회 활동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이후 국회의장, 대통령 권한 대행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96년 부산 동래 출신으로, 1919년 고교 재학 중 고향으로 내려가 3·1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후반, 항일단체인 신간회에 들어가 검찰위원으로 활약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자처벌법' 검찰 차장을 지냈다. 2대∼5대 민의원, 1960년 4·19 직후 대통령권한대행, 같은 해 민의원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5·16군사정변 당시 민주당 탈당 후 박정희 정권을 지지해 비난을 받았다.
곽상훈 (郭尙勳)
곽상훈은 동래3·1운동 참가, 신간회 활동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이후 국회의장, 대통령 권한 대행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96년 부산 동래 출신으로, 1919년 고교 재학 중 고향으로 내려가 3·1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후반, 항일단체인 신간회에 들어가 검찰위원으로 활약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자처벌법' 검찰 차장을 지냈다. 2대∼5대 민의원, 1960년 4·19 직후 대통령권한대행, 같은 해 민의원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5·16군사정변 당시 민주당 탈당 후 박정희 정권을 지지해 비난을 받았다.
박준승은 3 · 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동학 교인으로서 동학운동에 참여하고, 천도교 창건 이후 천도교 임실 교구를 이끌며 원로로 활동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 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박준승 (朴準承)
박준승은 3 · 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동학 교인으로서 동학운동에 참여하고, 천도교 창건 이후 천도교 임실 교구를 이끌며 원로로 활동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 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김원벽은 1919년 3월 1일과 3월 5일 경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서 학생 만세 시위를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1월부터 서울에서 학생 대표들의 독립운동 준비를 이끌었으며, 3월 1일 만세 시위와 3월 5일 학생 주도 만세 시위에 앞장서다 체포되었다. 출옥 후에는 신생활사와 시대일보사에서 창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원벽 (金元璧)
김원벽은 1919년 3월 1일과 3월 5일 경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서 학생 만세 시위를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1월부터 서울에서 학생 대표들의 독립운동 준비를 이끌었으며, 3월 1일 만세 시위와 3월 5일 학생 주도 만세 시위에 앞장서다 체포되었다. 출옥 후에는 신생활사와 시대일보사에서 창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강순 (姜舜)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하와이의 호놀룰루 소재 태평양잡지사에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관련된 자료를 수록하여 1919년에 간행한 역사서. 독립운동자료집.
대한독립혈전기 (大韓獨立血戰記)
하와이의 호놀룰루 소재 태평양잡지사에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관련된 자료를 수록하여 1919년에 간행한 역사서. 독립운동자료집.
문용기는 1919년 4월 4일에 일어난 이리 장터 만세 시위를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 · 1운동이 발발하자 익산의 남전교회 교인과 도남학교 교사,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4일 이리 장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에 앞장서다가 일본 헌병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문용기 (文鏞祺)
문용기는 1919년 4월 4일에 일어난 이리 장터 만세 시위를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 · 1운동이 발발하자 익산의 남전교회 교인과 도남학교 교사,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4일 이리 장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에 앞장서다가 일본 헌병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김진호는 일제강점기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 순회 전도를 하며 민족 계몽 사업에 힘쓴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06년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에게 감동하여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그의 지도 아래 신민회에 가입하며 민족 운동에 참여하였다. 3·1운동에서도 독립선언서를 각국 영사관에 배포하고 배재학교 학생을 시위에 동원하는 일을 맡았다. 상동청년학원, 공옥학교, 배재학교, YMCA에서 성경, 한문, 역사 등을 가르쳤다.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진호 (金鎭浩)
김진호는 일제강점기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 순회 전도를 하며 민족 계몽 사업에 힘쓴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06년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에게 감동하여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그의 지도 아래 신민회에 가입하며 민족 운동에 참여하였다. 3·1운동에서도 독립선언서를 각국 영사관에 배포하고 배재학교 학생을 시위에 동원하는 일을 맡았다. 상동청년학원, 공옥학교, 배재학교, YMCA에서 성경, 한문, 역사 등을 가르쳤다.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도인권은 일제강점기, 안악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평양 3·1운동에 참여한 후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군사 국장, 무관학교 교관, 임시 의정원 부의장 등을 역임한 감리교 목사이다. 구한국 군대에 자원 입대하여 무관학교 군사특과에 들어가 졸업한 뒤 하사관 간부 훈련 교관으로 임관되었으며,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이후부터 국권 회복 운동에 투신하였다.
도인권 (都寅權)
도인권은 일제강점기, 안악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평양 3·1운동에 참여한 후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군사 국장, 무관학교 교관, 임시 의정원 부의장 등을 역임한 감리교 목사이다. 구한국 군대에 자원 입대하여 무관학교 군사특과에 들어가 졸업한 뒤 하사관 간부 훈련 교관으로 임관되었으며,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이후부터 국권 회복 운동에 투신하였다.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안재홍 (安在鴻)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오하영은 일제강점기 수표교교회 목사, 목사경성지회 검사위원, 사동교회 담임목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자이다. 1879년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1906년 남감리교 미국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918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 독립선언식 후 붙잡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조선민족당 당수로 활동하였다. 1950년 납북되었다가 1960년 9월 2일 사망해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오하영 (吳夏英)
오하영은 일제강점기 수표교교회 목사, 목사경성지회 검사위원, 사동교회 담임목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자이다. 1879년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1906년 남감리교 미국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918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 독립선언식 후 붙잡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조선민족당 당수로 활동하였다. 1950년 납북되었다가 1960년 9월 2일 사망해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장충단공원은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있는 공원이다. 남산 동쪽 종남산 기슭 아래 동북쪽 일대로 영조 때에 남소영이 있었던 곳이다. 1900년에 고종황제가 이곳에 장충단을 설립하고 을미사변 때에 순사한 이경직과 홍계훈을 비롯한 장졸을 배향하여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일본은 장충단을 없애고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의도에 따라 장충단공원으로 명명하고, 벚꽃을 심는 등 유원지를 조성하였다. 해방 이후 이준의 동상과 사명대사의 동상이 건립되었으며 3·1운동 기념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등 항일운동과 관련된 기념물이 있는 민족공원이라 할 수 있다.
장충단공원 (奬忠壇公園)
장충단공원은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있는 공원이다. 남산 동쪽 종남산 기슭 아래 동북쪽 일대로 영조 때에 남소영이 있었던 곳이다. 1900년에 고종황제가 이곳에 장충단을 설립하고 을미사변 때에 순사한 이경직과 홍계훈을 비롯한 장졸을 배향하여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일본은 장충단을 없애고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의도에 따라 장충단공원으로 명명하고, 벚꽃을 심는 등 유원지를 조성하였다. 해방 이후 이준의 동상과 사명대사의 동상이 건립되었으며 3·1운동 기념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등 항일운동과 관련된 기념물이 있는 민족공원이라 할 수 있다.
유관순은 일제강점기 아우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에 태어나 1920년에 사망했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1916년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 소식을 전한 후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검거되어 투옥 중에도 옥중만세운동을 벌였고,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유관순 (柳寬順)
유관순은 일제강점기 아우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에 태어나 1920년에 사망했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1916년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 소식을 전한 후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검거되어 투옥 중에도 옥중만세운동을 벌였고,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이원익은 일제강점기 임시의정원 외교위원회위원, 임시정부 서무국장, 인사국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이다. 1885년(고종 22)에 태어나 1963년에 사망했다. 1919년 의주에서 목사로 재직하던 중 3·1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의용군을 모집하여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4월 김병조·장덕로 등과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여운형이 파리에 파견될 때, 한국시정진술서를 국제연맹 장로교만국연합총회 및 미주 각 교회에 보내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독립운동 자금조달차 입국했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
이원익 (李元益)
이원익은 일제강점기 임시의정원 외교위원회위원, 임시정부 서무국장, 인사국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이다. 1885년(고종 22)에 태어나 1963년에 사망했다. 1919년 의주에서 목사로 재직하던 중 3·1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의용군을 모집하여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4월 김병조·장덕로 등과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여운형이 파리에 파견될 때, 한국시정진술서를 국제연맹 장로교만국연합총회 및 미주 각 교회에 보내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독립운동 자금조달차 입국했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