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승은 3 · 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동학 교인으로서 동학운동에 참여하고, 천도교 창건 이후 천도교 임실 교구를 이끌며 원로로 활동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 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박준승(朴準承, 1865~1927)은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출신으로, 호는 자암(泚菴)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한 후 15세 때부터 2년간 김영원에게 유학(儒學)을 배웠다. 24세가 되던 1890년 4월 동학에 입도(入道)하였다. 1894년 동학운동에서 동학농민군으로 가담하였다. 동학운동 이후 동학 교단을 재건하는 일에 나섰다.
1904년 동학 교단에서 문명개화운동을 위해 진보회를 조직하자, 임실 지회를 결성해 활동하였다. 1906년 동학 3대 교주인 손병희가 천도교를 창건한 후 천도교 임실 교구를 설립하였다. 1912년에는 전라남도 장성군 천도교 대교구장에 올랐다.
1919년 2월 24일 상경하여 다음 날 손병희와 권동진을 만나 독립선언식 준비 소식을 듣고 민족 대표로서 참여하는 데 동의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29명의 민족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하였다. 1925년 천도교단이 신파와 구파로 나뉠 때 구파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1927년 3월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