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김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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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신문』은 1946년 3월 21일 이취성이 가정은 국가의 기본이라는 기치를 내걸며 발행한 일간지이다. 독자층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창간호에 "가정은 국가의 기본이요, 민족은 가족의 연장이다"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1946년 9월 26일 휴간, 1947년 3월 26일 속간되었으나 7월 26일 종간되었고, 이후 『대한일보』로 개칭, 발간되었다. 이승만을 지지한 우익지로 실질적 사장은 이종형이었다.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발행되었는데, 1면은 사설, 정치, 외신, 2면은 여성 관련 기사가 실렸다.
가정신문 (家政新聞)
『가정신문』은 1946년 3월 21일 이취성이 가정은 국가의 기본이라는 기치를 내걸며 발행한 일간지이다. 독자층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창간호에 "가정은 국가의 기본이요, 민족은 가족의 연장이다"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1946년 9월 26일 휴간, 1947년 3월 26일 속간되었으나 7월 26일 종간되었고, 이후 『대한일보』로 개칭, 발간되었다. 이승만을 지지한 우익지로 실질적 사장은 이종형이었다.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발행되었는데, 1면은 사설, 정치, 외신, 2면은 여성 관련 기사가 실렸다.
『부녀일보』는 1946년 7월 15일 구자권이 대구에서 창간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일간지이다. 중도노선의 성격을 띠었다. 구자권이 사장겸 발행인이었고, 편집국장은 초기에는 최해룡, 후기에는 최석채 그리고 서석범으로 바뀌었다. 대구 지역에서 발행된 『부녀일보』는 일천오백만 여성의 계몽운동과 여성의 권익을 향상시키는데 분투 노력하기 위해 창간하였다고 밝혔다. 한달 정도 휴간 후 1946년 10월 23일 속간되었으며, 1947년 12월 24일 종간되었으며 총 발행 호수는 319호이다.
부녀일보 (婦女日報|The Lady Daily News)
『부녀일보』는 1946년 7월 15일 구자권이 대구에서 창간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일간지이다. 중도노선의 성격을 띠었다. 구자권이 사장겸 발행인이었고, 편집국장은 초기에는 최해룡, 후기에는 최석채 그리고 서석범으로 바뀌었다. 대구 지역에서 발행된 『부녀일보』는 일천오백만 여성의 계몽운동과 여성의 권익을 향상시키는데 분투 노력하기 위해 창간하였다고 밝혔다. 한달 정도 휴간 후 1946년 10월 23일 속간되었으며, 1947년 12월 24일 종간되었으며 총 발행 호수는 319호이다.
『부인신문』은 1949년 2월 24일 박순천이 대한부인회를 결성하며 기존의 『부인신보』를 계승하여 발간한 여성을 대상으로한 일간지이자 대한부인회 기관지이다. 편집국장은 박주환이었다. 신문 판형은 타블로이드판 2면제였다. 1면은 정치 기사와 국제정세 관련 기사가 실렸으며 2면에는 사회, 문화, 여성단체 활동, 가정란을 비롯하여 여성 독자들을 위해 연재소설 등이 실렸다.
부인신문 (婦人新聞)
『부인신문』은 1949년 2월 24일 박순천이 대한부인회를 결성하며 기존의 『부인신보』를 계승하여 발간한 여성을 대상으로한 일간지이자 대한부인회 기관지이다. 편집국장은 박주환이었다. 신문 판형은 타블로이드판 2면제였다. 1면은 정치 기사와 국제정세 관련 기사가 실렸으며 2면에는 사회, 문화, 여성단체 활동, 가정란을 비롯하여 여성 독자들을 위해 연재소설 등이 실렸다.
『부인신보』는 1947년 5월 3일 박순천이 독립촉성애국부인회 기관지의 성격을 지니며 여성의 정치 참여를 목표로 여성을 대상으로 발간한 신문이다. 창간호에는 여성의 계몽과 단결의 도구이자 전달과 향상의 사도를 자처하며 여성의 해방의 선구자요, 조국재건에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한 종이 되고자 한다고 하였다. 일간지로서 판형은 타블로이드, 2면이었다. 1면에는 정치 관련 기사를 싣지 않고 가정, 문화 등의 기사를 실었다. 2면에는 정치, 경제, 사회 기사 등을 실었으며, 1949년 2월 『부인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부인신보 (婦人新報)
『부인신보』는 1947년 5월 3일 박순천이 독립촉성애국부인회 기관지의 성격을 지니며 여성의 정치 참여를 목표로 여성을 대상으로 발간한 신문이다. 창간호에는 여성의 계몽과 단결의 도구이자 전달과 향상의 사도를 자처하며 여성의 해방의 선구자요, 조국재건에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한 종이 되고자 한다고 하였다. 일간지로서 판형은 타블로이드, 2면이었다. 1면에는 정치 관련 기사를 싣지 않고 가정, 문화 등의 기사를 실었다. 2면에는 정치, 경제, 사회 기사 등을 실었으며, 1949년 2월 『부인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성공론』은 1946년 1월 1일 한국 여성의 해방과 계몽의 필요성을 내걸고 이경환의 주도로 창간된 좌익 계열의 여성 종합잡지이다. 1947년 7월 20일까지 총 4호가 간행되었는데, 창간 목적은 1천 5백만 여성의 계급의식 및 민족의식과 의무의 고양임을 내세웠다. 월간지를 표방하였으나 2년간 총 4호만 발행되었다. 잡지의 주요 필진으로는 유영준, 이정순, 이순금, 이주상, 한철, 이북만, 김종억 등이 좌익 인사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여성공론 (女性公論)
『여성공론』은 1946년 1월 1일 한국 여성의 해방과 계몽의 필요성을 내걸고 이경환의 주도로 창간된 좌익 계열의 여성 종합잡지이다. 1947년 7월 20일까지 총 4호가 간행되었는데, 창간 목적은 1천 5백만 여성의 계급의식 및 민족의식과 의무의 고양임을 내세웠다. 월간지를 표방하였으나 2년간 총 4호만 발행되었다. 잡지의 주요 필진으로는 유영준, 이정순, 이순금, 이주상, 한철, 이북만, 김종억 등이 좌익 인사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여성신문』은 1947년 4월 20일 독립촉성애국부인회 부위원장인 황기성이 『부녀신문』을 계승하여 발행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일간지이다. 황기성은 독립촉성애국부인단의 초대 회장,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부위원장, 전국여성단체총연맹의 부회장 등 여성 단체의 대표를 맡아 활동한 인물이다. 신문 판형은 타블로이드 2면판으로 발행되었으며 여성 문제에 대한 각종 칼럼과 해설, 여성 단체의 동정, 생활 정보 등의 내용은 2면에 실렸다. 창간 4개월 만인 1947년 8월경에 종간되었다.
여성신문 (女性新聞)
『여성신문』은 1947년 4월 20일 독립촉성애국부인회 부위원장인 황기성이 『부녀신문』을 계승하여 발행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일간지이다. 황기성은 독립촉성애국부인단의 초대 회장,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부위원장, 전국여성단체총연맹의 부회장 등 여성 단체의 대표를 맡아 활동한 인물이다. 신문 판형은 타블로이드 2면판으로 발행되었으며 여성 문제에 대한 각종 칼럼과 해설, 여성 단체의 동정, 생활 정보 등의 내용은 2면에 실렸다. 창간 4개월 만인 1947년 8월경에 종간되었다.
『여성일보』는 1960년 9월 1일 주간 『여성민보』를 계승하여 발행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신문이다. 김한우가 창간하였는데, 여권 확립과 사회 비판에 중점을 두고, 편파성을 배격하고 공정 신속한 보도 사명 완수를 표방하며 발간된 일간지이다. 주간지였던 『여성민보』를 계승하여 일간지로 전환하였으며, 1961년 5월 28일자가 종간호였다. 신문 발행 형태는 대판 4면의 16단제를 채택하였고, 1단 11자 체제였다.
여성일보 (女性日報)
『여성일보』는 1960년 9월 1일 주간 『여성민보』를 계승하여 발행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신문이다. 김한우가 창간하였는데, 여권 확립과 사회 비판에 중점을 두고, 편파성을 배격하고 공정 신속한 보도 사명 완수를 표방하며 발간된 일간지이다. 주간지였던 『여성민보』를 계승하여 일간지로 전환하였으며, 1961년 5월 28일자가 종간호였다. 신문 발행 형태는 대판 4면의 16단제를 채택하였고, 1단 11자 체제였다.
『여성주보』는 1960년 2월 10일, 김정례 주도로 창간되어 주간으로 발간된 여성 계몽지이다. 김정례가 발행·편집 겸 인쇄인이었고, 여성 교육, 여성 직업 보도, 가정 생활 과학화, 윤락 여성의 구호 등을 목적으로 창간한 주간지였다. 신문 판형은 대판 4면의 주간신문으로서 16단제에 1단 13자 체제를 채택하였다.
여성주보 (女性週報)
『여성주보』는 1960년 2월 10일, 김정례 주도로 창간되어 주간으로 발간된 여성 계몽지이다. 김정례가 발행·편집 겸 인쇄인이었고, 여성 교육, 여성 직업 보도, 가정 생활 과학화, 윤락 여성의 구호 등을 목적으로 창간한 주간지였다. 신문 판형은 대판 4면의 주간신문으로서 16단제에 1단 13자 체제를 채택하였다.
중선거구제는 1972년 12월 30일 제정된, 1개의 선거구에서 2~4인의 대표자를 선출하는 선거 제도이다. 투표 및 선출 방식은 유권자들이 한 후보자를 선택하고, 후보자들 가운데 다수표를 얻은 순서대로 의원을 선출하는 단기 비이양식 투표(Single Non-Transferable Vote)를 채택하고 있으며, 선거구를 광역화하여 소수당의 원내 진입 가능성을 높이고, 사표를 줄일 수 있다. 중선거구제는 대선거구제와 소선거구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고안된 제도이다.
중선거구제 (中選擧區制)
중선거구제는 1972년 12월 30일 제정된, 1개의 선거구에서 2~4인의 대표자를 선출하는 선거 제도이다. 투표 및 선출 방식은 유권자들이 한 후보자를 선택하고, 후보자들 가운데 다수표를 얻은 순서대로 의원을 선출하는 단기 비이양식 투표(Single Non-Transferable Vote)를 채택하고 있으며, 선거구를 광역화하여 소수당의 원내 진입 가능성을 높이고, 사표를 줄일 수 있다. 중선거구제는 대선거구제와 소선거구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고안된 제도이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1975년 박정희 군사정권과 동아일보사의 경영진에 의해 쫓겨난 동아일보 기자들이 결성한 조직이다. 해당 언론사 경영진에 맞서 해직기자들의 복직과 언론의 민주화, 자유언론을 실천하기 위한 효율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결성하였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東亞自由言論守護鬪爭委員會)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1975년 박정희 군사정권과 동아일보사의 경영진에 의해 쫓겨난 동아일보 기자들이 결성한 조직이다. 해당 언론사 경영진에 맞서 해직기자들의 복직과 언론의 민주화, 자유언론을 실천하기 위한 효율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결성하였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1984년 12월 19일 동아투위 사태 이후 해직된 기자들과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으로 인해 해직된 언론인, 출판인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된 시민단체이다. 언론의 민주화를 주장하는 시민단체인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모체로 하고 있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는 1998년 3월 27일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2006년 3월 24일 민주언론시민연협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민주언론시민연합 (民主言論市民連合)
민주언론시민연합은 1984년 12월 19일 동아투위 사태 이후 해직된 기자들과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으로 인해 해직된 언론인, 출판인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된 시민단체이다. 언론의 민주화를 주장하는 시민단체인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모체로 하고 있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는 1998년 3월 27일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2006년 3월 24일 민주언론시민연협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선거구획정위원회는 1994년 공정한 선거구 획정을 목표로 설립된 정부 기구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산하의 독립적 지위를 가지는 기구로 1994년 공정한 선거구 획정을 목표로 설립되었으며, 선거인 수와 당선자 정수 비율이 균등해야 한다는 투표 가치의 등가성을 확보하고, 정치적 이해에 따른 특정 후보나 특정 정당에게 유리하게 선거구를 정하는 게리맨더링 등을 방지하는 일을 하고 있다.
선거구획정위원회 (選擧區劃定委員會)
선거구획정위원회는 1994년 공정한 선거구 획정을 목표로 설립된 정부 기구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산하의 독립적 지위를 가지는 기구로 1994년 공정한 선거구 획정을 목표로 설립되었으며, 선거인 수와 당선자 정수 비율이 균등해야 한다는 투표 가치의 등가성을 확보하고, 정치적 이해에 따른 특정 후보나 특정 정당에게 유리하게 선거구를 정하는 게리맨더링 등을 방지하는 일을 하고 있다.
삼팔민주의거(三八民主義擧)는 1960년 3월 8일부터 3월 10일까지 충청남도 대전 지역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불법 ·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다. 이는 1960년 3월 8일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 선거연설회의 참여를 막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행위에 항의하여 일어난 운동이다.
3·8민주의거 (三八民主義擧)
삼팔민주의거(三八民主義擧)는 1960년 3월 8일부터 3월 10일까지 충청남도 대전 지역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불법 ·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다. 이는 1960년 3월 8일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 선거연설회의 참여를 막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행위에 항의하여 일어난 운동이다.
박영숙은 기독교 여성운동을 시작으로 환경운동, 생명문화운동, 민주화운동 등 사회운동을 펼쳤으며, 평화민주당 부총재 및 총재 권한 대행 그리고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제13대 국회의원으로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친 여성사회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다.
박영숙 (朴英淑)
박영숙은 기독교 여성운동을 시작으로 환경운동, 생명문화운동, 민주화운동 등 사회운동을 펼쳤으며, 평화민주당 부총재 및 총재 권한 대행 그리고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제13대 국회의원으로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친 여성사회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