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김영관"
검색결과 총 16건
웅진도독부는 660년 7월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백제 고토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군정기관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은 백제의 5방 체제를 바탕으로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도독부를 설치하여 지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백제 유민의 부흥운동이 전개되면서 웅진도독부만 겨우 유지하였고, 부흥운동을 진압한 이후에도 1도독부 체제로 정비하였다. 신라의 백제 고토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당이 백제를 직접 지배하려고 설치한 기구였므로 신라와 갈등을 빚었다. 신라는 676년에 나당전쟁에서 승리하고 점령지에 대한 실효지배 정책을 추진하여 웅진도독부를 퇴출시켰다.
웅진도독부 (熊津都督府)
웅진도독부는 660년 7월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백제 고토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군정기관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은 백제의 5방 체제를 바탕으로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도독부를 설치하여 지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백제 유민의 부흥운동이 전개되면서 웅진도독부만 겨우 유지하였고, 부흥운동을 진압한 이후에도 1도독부 체제로 정비하였다. 신라의 백제 고토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당이 백제를 직접 지배하려고 설치한 기구였므로 신라와 갈등을 빚었다. 신라는 676년에 나당전쟁에서 승리하고 점령지에 대한 실효지배 정책을 추진하여 웅진도독부를 퇴출시켰다.
삼국시대 백제 좌평으로 당나라에 투항한 유민.
예군 (禰軍)
삼국시대 백제 좌평으로 당나라에 투항한 유민.
삼국시대 백제 북방령으로 당나라에 투항한 유민.
예식진 (禰寔進)
삼국시대 백제 북방령으로 당나라에 투항한 유민.
남북국시대 당나라에서 행좌우림군장군, 농우절도사, 경략대사 등을 역임한 관리. 장군.
낙사계 (諾思計)
남북국시대 당나라에서 행좌우림군장군, 농우절도사, 경략대사 등을 역임한 관리. 장군.
고요묘 묘지명은 고구려 말기의 귀족으로 당에 귀순하여 활동한 고요묘의 묘지명이다. 고구려 멸망 후 당에 들어가 활동했던 고요묘의 활동을 기록해 무덤 속에 넣었던 묘지명이다. 묘지명에는 묘주의 관직, 성명, 출신지와 당으로 들어오게 된 까닭과 당에서의 활동 및 묘주의 죽음과 묻힌 곳 등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고구려의 소장 고요묘는 평양성이 함락될 때 당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 준 공으로 고위 무관직을 제수받고 황제를 호위하는 좌령군원외장군을 지냈다. 고구려를 배신하고 당에서 활약한 고구려 유민의 존재 양상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된다.
고요묘 묘지명 (高饒苗 墓誌銘)
고요묘 묘지명은 고구려 말기의 귀족으로 당에 귀순하여 활동한 고요묘의 묘지명이다. 고구려 멸망 후 당에 들어가 활동했던 고요묘의 활동을 기록해 무덤 속에 넣었던 묘지명이다. 묘지명에는 묘주의 관직, 성명, 출신지와 당으로 들어오게 된 까닭과 당에서의 활동 및 묘주의 죽음과 묻힌 곳 등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고구려의 소장 고요묘는 평양성이 함락될 때 당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 준 공으로 고위 무관직을 제수받고 황제를 호위하는 좌령군원외장군을 지냈다. 고구려를 배신하고 당에서 활약한 고구려 유민의 존재 양상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된다.
태비 부여씨 묘지명은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씨(扶餘氏, 690∼738)의 생애를 기록한 묘지명이다. 백제 멸망 후 당으로 끌려간 의자왕과 그 후손들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금석문이다. 묘비명에 의하면 태비 부여씨는 의자왕의 손자인 부여덕장(扶餘德璋)의 장녀로 태어났다. 당의 황족인 사괵왕 이옹의 두 번째 부인이 되어 사괵왕비(嗣?王妃)로 책봉되었다가 그의 아들 이거가 사괵왕이 되자 태비(太妃)로 책봉되었다. 태자 부여융의 자손들의 가계를 복원하고 실제 당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태비 부여씨 묘지명 (太妃 扶餘氏 墓誌銘)
태비 부여씨 묘지명은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씨(扶餘氏, 690∼738)의 생애를 기록한 묘지명이다. 백제 멸망 후 당으로 끌려간 의자왕과 그 후손들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금석문이다. 묘비명에 의하면 태비 부여씨는 의자왕의 손자인 부여덕장(扶餘德璋)의 장녀로 태어났다. 당의 황족인 사괵왕 이옹의 두 번째 부인이 되어 사괵왕비(嗣?王妃)로 책봉되었다가 그의 아들 이거가 사괵왕이 되자 태비(太妃)로 책봉되었다. 태자 부여융의 자손들의 가계를 복원하고 실제 당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천비 묘지명은 고구려 연개소문의 후손으로 당에서 태어나 활동하다가 죽은 천비(708~729)의 일생을 기록한 묘지명이다. 1926년 중국 하남성 낙양시에 있는 소위 삼녀총의 서쪽 봉분에서 발견되었다. 크기는 가로 세로 모두 60㎝로 정방형이다. 묘지명은 천비의 아버지인 천은이 지었으며, 25행, 569자이다. 내용은 묘주의 성품, 출신과 선조, 관력, 죽음과 장례에 대해 기록하였고, 끝에 묘주를 추모하는 명을 기록했다. 묘지명은 고구려 연개소문 가문이 당 현종 무렵까지도 당에서 계속 가문을 유지하였으며, 관직에도 진출하여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천비 묘지명 (泉毖 墓誌銘)
천비 묘지명은 고구려 연개소문의 후손으로 당에서 태어나 활동하다가 죽은 천비(708~729)의 일생을 기록한 묘지명이다. 1926년 중국 하남성 낙양시에 있는 소위 삼녀총의 서쪽 봉분에서 발견되었다. 크기는 가로 세로 모두 60㎝로 정방형이다. 묘지명은 천비의 아버지인 천은이 지었으며, 25행, 569자이다. 내용은 묘주의 성품, 출신과 선조, 관력, 죽음과 장례에 대해 기록하였고, 끝에 묘주를 추모하는 명을 기록했다. 묘지명은 고구려 연개소문 가문이 당 현종 무렵까지도 당에서 계속 가문을 유지하였으며, 관직에도 진출하여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부여융 묘지명은 백제 의자왕의 태자로 웅진도독을 역임한 부여융(615~682)의 일생을 기록한 묘지명이다. 1919년 중국 하남성 낙양시 망산에서 출토되었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부여융의 장례를 치른 682년 12월에 만들어졌다. 크기는 가로 56.8㎝, 세로 대략 57.8㎝의 정방형에 가깝다. 가로와 세로로 계선을 긋고 27자씩 26행을 해서체로 써서 새겼다. 부여융의 선조와 백제 멸망 후 일어난 부흥운동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웅진도독부와 당에서의 활동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부여융 묘지명 (扶餘隆 墓誌銘)
부여융 묘지명은 백제 의자왕의 태자로 웅진도독을 역임한 부여융(615~682)의 일생을 기록한 묘지명이다. 1919년 중국 하남성 낙양시 망산에서 출토되었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부여융의 장례를 치른 682년 12월에 만들어졌다. 크기는 가로 56.8㎝, 세로 대략 57.8㎝의 정방형에 가깝다. 가로와 세로로 계선을 긋고 27자씩 26행을 해서체로 써서 새겼다. 부여융의 선조와 백제 멸망 후 일어난 부흥운동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웅진도독부와 당에서의 활동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천헌성 묘지명은 고구려 연개소문의 후손으로 당에 투항한 천헌성(651~692)의 일생을 기록한 묘지명이다. 현재 묘지명 원석과 탁본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고 판독문만 남아 있다. 천헌성은 연개소문의 손자이자 당에 투항한 천남생의 아들이다. 천남생의 봉작을 이어받아 변국공(卞國公)에 책봉된 천헌성의 활약상과 무고로 인한 억울한 죽음과 신원 등에 대해 기재되어 있다. 특히 고구려가 멸망한 후 연개소문의 부인이 당에 들어와 살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이다. 고구려 멸망과 당에 투항한 연개소문 가문의 동향에 대한 자료로서 매우 가치가 있다.
천헌성 묘지명 (泉獻誠 墓誌銘)
천헌성 묘지명은 고구려 연개소문의 후손으로 당에 투항한 천헌성(651~692)의 일생을 기록한 묘지명이다. 현재 묘지명 원석과 탁본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고 판독문만 남아 있다. 천헌성은 연개소문의 손자이자 당에 투항한 천남생의 아들이다. 천남생의 봉작을 이어받아 변국공(卞國公)에 책봉된 천헌성의 활약상과 무고로 인한 억울한 죽음과 신원 등에 대해 기재되어 있다. 특히 고구려가 멸망한 후 연개소문의 부인이 당에 들어와 살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이다. 고구려 멸망과 당에 투항한 연개소문 가문의 동향에 대한 자료로서 매우 가치가 있다.
공주지역의 건물지와 고분 등 유적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기와와 벽돌 등에 새겨진 문자.
공주 출토 백제와전명 (公州 出土 百濟瓦塼銘)
공주지역의 건물지와 고분 등 유적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기와와 벽돌 등에 새겨진 문자.
당평백제국비는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의 제1층 탑신과 옥개받침에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蘇定方)의 공적을 새겨둔 기공비이다. 당평제비, 평제비, 소정방비, 당평제탑비, 평제탑비, 정림사지오층석탑각자, 정림사지오층석탑미석각자 등으로도 불린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이 당의 백제정벌을 합리화하고 종군 장수를 미화하기 위해 백제를 상징하는 정림사 석탑에 비문을 새겨 넣었다. 당군의 공적만 기록하였다는 한계가 있지만 백제 멸망 당시 정치상황과 지방지배체제, 호구 상황 등을 알려주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높다.
당평백제국비 (唐平百濟國碑)
당평백제국비는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의 제1층 탑신과 옥개받침에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蘇定方)의 공적을 새겨둔 기공비이다. 당평제비, 평제비, 소정방비, 당평제탑비, 평제탑비, 정림사지오층석탑각자, 정림사지오층석탑미석각자 등으로도 불린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이 당의 백제정벌을 합리화하고 종군 장수를 미화하기 위해 백제를 상징하는 정림사 석탑에 비문을 새겨 넣었다. 당군의 공적만 기록하였다는 한계가 있지만 백제 멸망 당시 정치상황과 지방지배체제, 호구 상황 등을 알려주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높다.
예인수 묘지명은 백제 유민 예인수와 부인 약간씨 부부의 합장 묘지명이다. 백제 유민 예식진의 손자이자 예소사의 장남인 예인수와 부인 약간씨의 합장 묘지명으로 아들인 예적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에 귀의하여 관작을 받은 예식진과 좌무위장구이 된 예소사의 활동과 묘주 예인수의 관력과 생애, 부인 약간씨의 행적, 장례 등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백제 멸망 후 당에서 태어난 백제 유민의 묘지명으로 예씨 가족의 활동과 관력, 혼인 등에 대해서 알려주는 금석문 자료이다. 2010년 서안시 장안구 곽두진 곽두남촌에서 출토되었는데 현재는 서안박물원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예인수 묘지명 (禰仁秀 墓誌銘)
예인수 묘지명은 백제 유민 예인수와 부인 약간씨 부부의 합장 묘지명이다. 백제 유민 예식진의 손자이자 예소사의 장남인 예인수와 부인 약간씨의 합장 묘지명으로 아들인 예적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에 귀의하여 관작을 받은 예식진과 좌무위장구이 된 예소사의 활동과 묘주 예인수의 관력과 생애, 부인 약간씨의 행적, 장례 등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백제 멸망 후 당에서 태어난 백제 유민의 묘지명으로 예씨 가족의 활동과 관력, 혼인 등에 대해서 알려주는 금석문 자료이다. 2010년 서안시 장안구 곽두진 곽두남촌에서 출토되었는데 현재는 서안박물원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고덕 묘지명은 고구려 유민 고덕의 출신과 일생에 대해 기록한 묘지명이다. 중국 하남성 낙양시에서 출토되었다. 재질은 청석이며, 가로와 세로 45.5㎝로 정방형으로 가로 24행, 세로 24행으로 괘선을 그어 구획한 뒤에 음각하여 새겨 넣었다. 묘지명에 의하면, 고덕의 선조는 요양에 거주한 세족이었는데 당 태종이 고구려를 원정할 즈음 당에 투항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덕은 710년에 등용되어 여러 외직에 제수되었으며 사냥과 순행에 동행하는 등 황제를 호위하는 무인으로 활약하였다. 이 묘지명은 멸망기 고구려와 당과의 관계 및 고구려 유민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고덕 묘지명 (高德 墓誌銘)
고덕 묘지명은 고구려 유민 고덕의 출신과 일생에 대해 기록한 묘지명이다. 중국 하남성 낙양시에서 출토되었다. 재질은 청석이며, 가로와 세로 45.5㎝로 정방형으로 가로 24행, 세로 24행으로 괘선을 그어 구획한 뒤에 음각하여 새겨 넣었다. 묘지명에 의하면, 고덕의 선조는 요양에 거주한 세족이었는데 당 태종이 고구려를 원정할 즈음 당에 투항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덕은 710년에 등용되어 여러 외직에 제수되었으며 사냥과 순행에 동행하는 등 황제를 호위하는 무인으로 활약하였다. 이 묘지명은 멸망기 고구려와 당과의 관계 및 고구려 유민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김일성 묘지명은 당나라에서 활동한 신라 왕족 출신인 김일성(713~774)과 부인의 합장 묘지명이다. 김일성 묘지명은 그의 자가 일용이므로 김일용 묘지명이라고도 부른다. 묘지명의 재질은 청석이며 지석과 개석을 모두 갖추고 있다. 김일성은 신라 왕족 출신으로, 당에 들어가 장안에서 현종 황제 등을 숙위하였고 당나라 여인 장씨와 혼인하여 장안성에서 살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김일성 묘지명은 문헌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당에서 활동한 신라 왕족의 면모와 신라 중대 정치사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금석문 자료이다.
김일성 묘지명 (金日晟 墓誌銘)
김일성 묘지명은 당나라에서 활동한 신라 왕족 출신인 김일성(713~774)과 부인의 합장 묘지명이다. 김일성 묘지명은 그의 자가 일용이므로 김일용 묘지명이라고도 부른다. 묘지명의 재질은 청석이며 지석과 개석을 모두 갖추고 있다. 김일성은 신라 왕족 출신으로, 당에 들어가 장안에서 현종 황제 등을 숙위하였고 당나라 여인 장씨와 혼인하여 장안성에서 살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김일성 묘지명은 문헌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당에서 활동한 신라 왕족의 면모와 신라 중대 정치사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금석문 자료이다.
난원경 묘지명은 백제 유민 난원경과 부인 감씨의 가계와 일생 등을 기록한 묘지명이다. 1960년에 발견되었으며 현재 중국 노산현문화관에 보관되어 있다. 난원경은 당나라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무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삭방군 총관 등을 지냈다. 묘지명에 따르면 난원경의 고조는 백제에서 달솔에 오른 난조이며, 조부 난한과 부친 난문은 백제 멸망 당시 당에 투항하여 웅진도독부에서 활동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외에도 묘지명에는 백제 난씨 가문의 출자와 성씨의 유래, 난원경의 죽음과 장례, 부인 감씨의 생애와 죽음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백제유민사 연구에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난원경 묘지명 (難元慶 墓誌銘)
난원경 묘지명은 백제 유민 난원경과 부인 감씨의 가계와 일생 등을 기록한 묘지명이다. 1960년에 발견되었으며 현재 중국 노산현문화관에 보관되어 있다. 난원경은 당나라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무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삭방군 총관 등을 지냈다. 묘지명에 따르면 난원경의 고조는 백제에서 달솔에 오른 난조이며, 조부 난한과 부친 난문은 백제 멸망 당시 당에 투항하여 웅진도독부에서 활동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외에도 묘지명에는 백제 난씨 가문의 출자와 성씨의 유래, 난원경의 죽음과 장례, 부인 감씨의 생애와 죽음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백제유민사 연구에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예소사 묘지명은 중국 섬서성 서안시에서 발굴된 백제 유민 예소사의 묘지명이다. 2010년 4월 서안시 문물보호고고연구소가 발굴하였다. 개석은 정방형이며, 가로 60㎝, 세로 60㎝, 두께 13.3㎝이다. 지석은 판석형이며, 가로 60㎝, 세로 60㎝, 두께 15㎝이다. 지석에는 7대조 예숭이 산동 낭야에서 5세기 전반에 전란을 피해 백제로 이주했으며, 백제가 멸망 후 증조부터는 다시 중국에서 활동했다는 내용과 예소사의 입당 후 활동과 장례, 자손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묘지명은 백제와 중국 간의 인적 교류 양상에 대해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예소사 묘지명 (禰素士 墓誌銘)
예소사 묘지명은 중국 섬서성 서안시에서 발굴된 백제 유민 예소사의 묘지명이다. 2010년 4월 서안시 문물보호고고연구소가 발굴하였다. 개석은 정방형이며, 가로 60㎝, 세로 60㎝, 두께 13.3㎝이다. 지석은 판석형이며, 가로 60㎝, 세로 60㎝, 두께 15㎝이다. 지석에는 7대조 예숭이 산동 낭야에서 5세기 전반에 전란을 피해 백제로 이주했으며, 백제가 멸망 후 증조부터는 다시 중국에서 활동했다는 내용과 예소사의 입당 후 활동과 장례, 자손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묘지명은 백제와 중국 간의 인적 교류 양상에 대해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