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문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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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창은 고려시대 개경에 설치되어 왕실의 재정 관리와 빈민 구휼 등을 담당하였던 창고이다. 1090년(선종 7) 3월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고종 연간에 최이의 측근 박훤의 건의로 다시 설치되었다. 재건 후에는 주로 빈민을 구휼하거나 국가에서 백성들을 위무하는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신흥창 (新興倉)
신흥창은 고려시대 개경에 설치되어 왕실의 재정 관리와 빈민 구휼 등을 담당하였던 창고이다. 1090년(선종 7) 3월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고종 연간에 최이의 측근 박훤의 건의로 다시 설치되었다. 재건 후에는 주로 빈민을 구휼하거나 국가에서 백성들을 위무하는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마도 3호선은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저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침몰선이다. 이 선박은 전라남도 여수 일대에서 거둔 각종 물자를 싣고 당시 임시수도였던 강화도를 향해 운항하다가 마도 해역에서 침몰하였다. 남아 있는 배의 규모는 길이 12m, 너비 8m이며, 전체적인 구조는 밑바닥과 이물, 고물이 모두 평평한 평저선이다. 선박 내부에서는 45점의 도기, 62종의 금속 유물, 빗, 장기알 등 당대인들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유물이 출수되었다. 목간을 통해 볼 때 마도 3호선의 침몰 연대는 1265~1268년 사이로 추정된다.
마도 3호선 (馬島 三號船)
마도 3호선은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저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침몰선이다. 이 선박은 전라남도 여수 일대에서 거둔 각종 물자를 싣고 당시 임시수도였던 강화도를 향해 운항하다가 마도 해역에서 침몰하였다. 남아 있는 배의 규모는 길이 12m, 너비 8m이며, 전체적인 구조는 밑바닥과 이물, 고물이 모두 평평한 평저선이다. 선박 내부에서는 45점의 도기, 62종의 금속 유물, 빗, 장기알 등 당대인들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유물이 출수되었다. 목간을 통해 볼 때 마도 3호선의 침몰 연대는 1265~1268년 사이로 추정된다.
태안 해저유물은 충청남도 태안군 마도 해역에서 발굴된 해저유물이다. 발굴된 유물은 고려시대~조선시대의 선박과 청자, 도기, 백자, 곡물, 솥, 청동숟가락, 목간, 죽찰 등의 물품이다. 2007년에 고려청자를 2만 3천여 점을 적재한 태안선이 처음 출수된 이후 2009년~2015년까지 고려시대 선박 3척과 조선시대 선박 1척이 추가로 조사되었다. 그 외에도 태안 마도 해역에서는 분청사기, 백자, 중국 도자기, 닻돌 등 다양한 유물이 출수되었다.
태안 해저유물 (泰安 海底遺物)
태안 해저유물은 충청남도 태안군 마도 해역에서 발굴된 해저유물이다. 발굴된 유물은 고려시대~조선시대의 선박과 청자, 도기, 백자, 곡물, 솥, 청동숟가락, 목간, 죽찰 등의 물품이다. 2007년에 고려청자를 2만 3천여 점을 적재한 태안선이 처음 출수된 이후 2009년~2015년까지 고려시대 선박 3척과 조선시대 선박 1척이 추가로 조사되었다. 그 외에도 태안 마도 해역에서는 분청사기, 백자, 중국 도자기, 닻돌 등 다양한 유물이 출수되었다.
덕천고는 고려 후기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던 기관이다. 충렬왕대에 제국대장공주의 식읍에서 납부하는 곡식과 옷감을 관리한 것과 같은, 왕실의 사적인 재정을 담당했던 기관이다. 충선왕이 이를 물려받아 덕천창(德泉倉)이라고 부르다가 1325년(충숙왕 12)에 덕천고로 다시 고쳤다. 의성창(義成倉)과 함께 왕실의 사적 재정을 관리하는 기능을 하였으므로 사장(私藏)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덕천고 (德泉庫)
덕천고는 고려 후기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던 기관이다. 충렬왕대에 제국대장공주의 식읍에서 납부하는 곡식과 옷감을 관리한 것과 같은, 왕실의 사적인 재정을 담당했던 기관이다. 충선왕이 이를 물려받아 덕천창(德泉倉)이라고 부르다가 1325년(충숙왕 12)에 덕천고로 다시 고쳤다. 의성창(義成倉)과 함께 왕실의 사적 재정을 관리하는 기능을 하였으므로 사장(私藏)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전운사(轉運使)는 고려 전기에 각 도(道)에서 징수한 조세를 개경으로 운송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이다. 전운사의 주요 업무는 제도(諸道)에서 징수한 조세를 중앙으로 운송하는 업무를 감독하는 것이었다. 전운사는 조세 운송 업무뿐만 아니라 외관과 함께 백성의 고소 업무를 처리하는 권한까지 수행하였다. 이는 지방 제도가 정비되면서 1029년(현종 20)에 폐지되었다.
전운사 (轉運使)
전운사(轉運使)는 고려 전기에 각 도(道)에서 징수한 조세를 개경으로 운송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이다. 전운사의 주요 업무는 제도(諸道)에서 징수한 조세를 중앙으로 운송하는 업무를 감독하는 것이었다. 전운사는 조세 운송 업무뿐만 아니라 외관과 함께 백성의 고소 업무를 처리하는 권한까지 수행하였다. 이는 지방 제도가 정비되면서 1029년(현종 20)에 폐지되었다.
조장은 고려 초에 지방의 조세를 징수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이다. 금유(今有)와 함께 지방으로 파견되어 조세를 징수하였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983년(성종 2) 2월에 12목(牧)이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12목에 주목(州牧)이 파견되기 이전에 지방관의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조장 (租藏)
조장은 고려 초에 지방의 조세를 징수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이다. 금유(今有)와 함께 지방으로 파견되어 조세를 징수하였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983년(성종 2) 2월에 12목(牧)이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12목에 주목(州牧)이 파견되기 이전에 지방관의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진(津)은 고려 · 조선시대 주요 강변의 요충지에 설치했던 나루이다. 진은 포(浦)와 함께 사람들이 강을 건너거나 배가 출발하는 해양 교통의 요지를 일컫는 말이다. 고려시대의 진은 단순히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나루터가 아니라 왕명이 신속히 전달될 수 있도록 하고, 관리나 여행자들이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군현(郡縣)의 하부 조직이었다.
진 (津)
진(津)은 고려 · 조선시대 주요 강변의 요충지에 설치했던 나루이다. 진은 포(浦)와 함께 사람들이 강을 건너거나 배가 출발하는 해양 교통의 요지를 일컫는 말이다. 고려시대의 진은 단순히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나루터가 아니라 왕명이 신속히 전달될 수 있도록 하고, 관리나 여행자들이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군현(郡縣)의 하부 조직이었다.
해룡창은 고려시대에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홍내동, 오천동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고려시대 13조창 중의 하나로 전라남도 순천시 홍내동 해룡산 일대에 있었다. 추수가 끝난 후 전라도 동남부 지역의 조세를 모아 두었다가 2월에 발송을 시작하여 4월까지 마치도록 하였다. 정종 때 전국 조창에 조운선을 설치할 때 1,000석을 적재할 수 있는 초마선 6척이 설치되어 개경까지의 조세 운동을 담당하였다. 지금도 해룡산 정상부와 남서쪽 평지에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편과 청자편이 종종 목격된다.
해룡창 (海龍倉)
해룡창은 고려시대에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홍내동, 오천동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고려시대 13조창 중의 하나로 전라남도 순천시 홍내동 해룡산 일대에 있었다. 추수가 끝난 후 전라도 동남부 지역의 조세를 모아 두었다가 2월에 발송을 시작하여 4월까지 마치도록 하였다. 정종 때 전국 조창에 조운선을 설치할 때 1,000석을 적재할 수 있는 초마선 6척이 설치되어 개경까지의 조세 운동을 담당하였다. 지금도 해룡산 정상부와 남서쪽 평지에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편과 청자편이 종종 목격된다.
해전고는 고려 후기에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의 명복을 비는 천수도량을 세운 뒤 비용을 충당하고자 설립하여 보원고(寶源庫)에 소속시킨 왕실 창고이다.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공민왕이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인희전(仁熙殿)에 신위(神位)를 두고, 천수도량을 세웠다. 이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해전고를 설립하고 보원고에 속하게 하였다. 노국대장공주가 사용하던 물품을 베로 바꾸어 재원을 마련한 뒤 각 도에 나누어 주고 이자를 걷어 운영하였다.
해전고 (解典庫)
해전고는 고려 후기에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의 명복을 비는 천수도량을 세운 뒤 비용을 충당하고자 설립하여 보원고(寶源庫)에 소속시킨 왕실 창고이다.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공민왕이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인희전(仁熙殿)에 신위(神位)를 두고, 천수도량을 세웠다. 이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해전고를 설립하고 보원고에 속하게 하였다. 노국대장공주가 사용하던 물품을 베로 바꾸어 재원을 마련한 뒤 각 도에 나누어 주고 이자를 걷어 운영하였다.
부용창(富用倉)은 고려시대에 홍주(洪州) 관내의 부용창산(富用倉山)에 있었던 창고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저자 서긍(徐兢)이 충청도 홍주 관내 부용창산에 있다고 기록한 고려시대의 창고이다. 개경의 우창(右倉)과 함께 전쟁이나 흉년에 대비하여 곡물을 비축하는 기능을 하였다.
부용창 (富用倉)
부용창(富用倉)은 고려시대에 홍주(洪州) 관내의 부용창산(富用倉山)에 있었던 창고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저자 서긍(徐兢)이 충청도 홍주 관내 부용창산에 있다고 기록한 고려시대의 창고이다. 개경의 우창(右倉)과 함께 전쟁이나 흉년에 대비하여 곡물을 비축하는 기능을 하였다.
수수(水手)는 고려시대에 조운선이나 군선 등에 탑승하여 노를 젓거나 뱃일을 맡아보던 운항 담당자이다. 선장인 초공(梢工)과 함께 배의 운항을 담당하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고려 말기, 왜구 침입 시기에는 선군(船軍) 등으로도 불렸으며, 조선 건국 후에는 조졸(漕卒)과 수군(水軍)으로 분화되었다.
수수 (水手)
수수(水手)는 고려시대에 조운선이나 군선 등에 탑승하여 노를 젓거나 뱃일을 맡아보던 운항 담당자이다. 선장인 초공(梢工)과 함께 배의 운항을 담당하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고려 말기, 왜구 침입 시기에는 선군(船軍) 등으로도 불렸으며, 조선 건국 후에는 조졸(漕卒)과 수군(水軍)으로 분화되었다.
자섬저화고는 고려 말기, 1391년(공양왕 3)에 설치되어 저화(楮貨)의 발행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1391년(공양왕 3) 7월에 도평의사사의 건의에 따라 설치되어 저화를 발행하는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1392년(공양왕 4) 4월 시중 심덕부(沈德符) 등이 건의하여 폐지되고, 인판(印板)은 소각되었으며, 이미 발행된 저화는 회수하여 다시 종이의 재료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자섬저화고 (資贍楮貨庫)
자섬저화고는 고려 말기, 1391년(공양왕 3)에 설치되어 저화(楮貨)의 발행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1391년(공양왕 3) 7월에 도평의사사의 건의에 따라 설치되어 저화를 발행하는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1392년(공양왕 4) 4월 시중 심덕부(沈德符) 등이 건의하여 폐지되고, 인판(印板)은 소각되었으며, 이미 발행된 저화는 회수하여 다시 종이의 재료로 사용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