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방일권"
검색결과 총 14건
러시아 사할린 지역의 한인 단체.
사할린한인협회 (Sakhalin韓人協會)
러시아 사할린 지역의 한인 단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마을인 신한촌의 자치기구.
신한촌민회 (新韓村民會)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마을인 신한촌의 자치기구.
화태억류귀환한국인회는 1958년에 사할린 한인의 귀환 운동을 펴나가려고 일본 도쿄에서 결성된 단체이다. ‘화태’는 일본어로 사할린을 일컫는 말이다. 이 단체는 일제강점기에 사할린에 강제 동원되었다가 일본으로 송환된 한인들에 의해서 조직되었다. 사할린 한인과 한국 가족의 서신 교환을 비롯하여 귀국 희망자 명단 작성, 재판 추진, 가족 상봉 추진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 단체는 피해 당사자가 30여 년이 넘도록 꾸준히 참여하여 사할린 한인 귀환의 실질적 결실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2000년대 이후에 사실상 활동을 정리하였다.
화태억류귀환한국인회 (樺太抑留歸還韓國人會)
화태억류귀환한국인회는 1958년에 사할린 한인의 귀환 운동을 펴나가려고 일본 도쿄에서 결성된 단체이다. ‘화태’는 일본어로 사할린을 일컫는 말이다. 이 단체는 일제강점기에 사할린에 강제 동원되었다가 일본으로 송환된 한인들에 의해서 조직되었다. 사할린 한인과 한국 가족의 서신 교환을 비롯하여 귀국 희망자 명단 작성, 재판 추진, 가족 상봉 추진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 단체는 피해 당사자가 30여 년이 넘도록 꾸준히 참여하여 사할린 한인 귀환의 실질적 결실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2000년대 이후에 사실상 활동을 정리하였다.
1912년에,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에서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발행한 잡지.
대한인정교보 (大韓人正敎報)
1912년에,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에서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발행한 잡지.
『새고려신문』은 1949년에, 소련 공산당이 사할린 한인의 사상 교화를 위해 한글로 창간한 해외 한인 신문이다. 하바롭스크주 공산당위원회의 기관지 『조선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창간하였으나 1950년에 사할린주 공산당 위원회가 관할하게 되었다. 1961년 『레닌의 길로』, 1991년 『새고려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까지 간행되고 있다. 한국어와 러시아어 두 언어로 매주 1회 발간된다. 초기에는 사상, 공업, 문화 등을 다루었으며, 현재는 지역 소식, 한국의 문화와 역사, 기고문 등을 싣는다. 사할린에서 한국어와 민족 문화를 보존하는 데 주요하게 기여하고 있다.
새고려신문 (새高麗新聞)
『새고려신문』은 1949년에, 소련 공산당이 사할린 한인의 사상 교화를 위해 한글로 창간한 해외 한인 신문이다. 하바롭스크주 공산당위원회의 기관지 『조선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창간하였으나 1950년에 사할린주 공산당 위원회가 관할하게 되었다. 1961년 『레닌의 길로』, 1991년 『새고려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까지 간행되고 있다. 한국어와 러시아어 두 언어로 매주 1회 발간된다. 초기에는 사상, 공업, 문화 등을 다루었으며, 현재는 지역 소식, 한국의 문화와 역사, 기고문 등을 싣는다. 사할린에서 한국어와 민족 문화를 보존하는 데 주요하게 기여하고 있다.
1945년 8월에 일본인들이 미즈호 마을의 조선인 약 35명을 학살한 사건.
미즈호 학살사건 (みずほ 虐殺事件)
1945년 8월에 일본인들이 미즈호 마을의 조선인 약 35명을 학살한 사건.
개척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던 초기 한인마을이다. 개척리는 ‘개체기’, ‘카레이스카야 슬라보트카’라고도 불렸다. 1870년대 군항 건설과 연해주 개발이 시작되면서 일자리를 찾아온 한인들이 시 광장 주변에 살았다. 1885년과 1892년 콜레라가 발생하자 시 당국은 한인 거주지를 아무르만에 접한 남쪽 언덕으로 옮겼다. 이곳을 러시아인들이 ‘고려인촌’, ‘한인촌’이란 의미로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라 하였다. 1911년 러시아 당국은 전염병을 핑계로 개척리 거주 한인들을 시의 서북쪽으로 이주시켰다. 새로운 한인촌은 이후 한인사회의 새로운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개척리 (開拓里)
개척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던 초기 한인마을이다. 개척리는 ‘개체기’, ‘카레이스카야 슬라보트카’라고도 불렸다. 1870년대 군항 건설과 연해주 개발이 시작되면서 일자리를 찾아온 한인들이 시 광장 주변에 살았다. 1885년과 1892년 콜레라가 발생하자 시 당국은 한인 거주지를 아무르만에 접한 남쪽 언덕으로 옮겼다. 이곳을 러시아인들이 ‘고려인촌’, ‘한인촌’이란 의미로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라 하였다. 1911년 러시아 당국은 전염병을 핑계로 개척리 거주 한인들을 시의 서북쪽으로 이주시켰다. 새로운 한인촌은 이후 한인사회의 새로운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1875년에 형성된 러시아의 대표적인 한인 마을.
나선동 (羅鮮洞)
1875년에 형성된 러시아의 대표적인 한인 마을.
1908년 4월에 러시아 얀치헤에서 결성된 한인 구국운동 단체.
동의회 (同義會)
1908년 4월에 러시아 얀치헤에서 결성된 한인 구국운동 단체.
1867년에 러시아 포시예트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세운 마을.
시디미 (Sidimi)
1867년에 러시아 포시예트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세운 마을.
1872년에 러시아 포시예트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세운 마을.
아디미 (Адими)
1872년에 러시아 포시예트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세운 마을.
연추는 러시아 연해주에 있었던 한인 마을이다. 시모노보, 얀치헤(延秋, 煙秋, 烟秋)라고도 한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옆을 흐르는 강인 연추하(延秋河)를 따서 붙였다. 1863년에 한인들이 러시아 연해주 지신허에 마을을 이루었다. 1868년에 지신허 마을에서 서쪽으로 14㎞ 떨어진 연추 강변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 1923년 중연추 마을이 집단 농장으로 개조되었다. 1937년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로 마을 주민이 강제 이주되면서 상연추 마을도 폐쇄되었다. 1972년에 하연추 마을 이름을 러시아어인 추카노보로 바꾸었다.
연추 (煙秋)
연추는 러시아 연해주에 있었던 한인 마을이다. 시모노보, 얀치헤(延秋, 煙秋, 烟秋)라고도 한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옆을 흐르는 강인 연추하(延秋河)를 따서 붙였다. 1863년에 한인들이 러시아 연해주 지신허에 마을을 이루었다. 1868년에 지신허 마을에서 서쪽으로 14㎞ 떨어진 연추 강변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 1923년 중연추 마을이 집단 농장으로 개조되었다. 1937년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로 마을 주민이 강제 이주되면서 상연추 마을도 폐쇄되었다. 1972년에 하연추 마을 이름을 러시아어인 추카노보로 바꾸었다.
1869년 4월에 러시아 수이푼강 주변에 조성된 한인 마을.
육성촌 (六城村)
1869년 4월에 러시아 수이푼강 주변에 조성된 한인 마을.
지신허는 1863년 이후에 러시아 이주 한인이 모여 산 최초의 한인 마을이다. ‘지신허(地信墟, 地新墟)’, ‘지신하(地新河)’, 레자노보(Rezanovo)라고 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연해주 일대에 만들어진 한인 집단 거주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마을이다. 1863년 함경도 출신 최운보와 양응범이 러시아 포시예트(Posyet) 구역에 정착하면서 지신허 마을을 개척하였다. 1864년에 60가구 308명에서 1900년대에는 인구가 1,600명을 웃돌았다. 1937년에 스탈린이 한인들을 강제 이주 시킨 뒤, 러시아 농민 집단농장으로 바뀌었다.
지신허 (地新墟)
지신허는 1863년 이후에 러시아 이주 한인이 모여 산 최초의 한인 마을이다. ‘지신허(地信墟, 地新墟)’, ‘지신하(地新河)’, 레자노보(Rezanovo)라고 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연해주 일대에 만들어진 한인 집단 거주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마을이다. 1863년 함경도 출신 최운보와 양응범이 러시아 포시예트(Posyet) 구역에 정착하면서 지신허 마을을 개척하였다. 1864년에 60가구 308명에서 1900년대에는 인구가 1,600명을 웃돌았다. 1937년에 스탈린이 한인들을 강제 이주 시킨 뒤, 러시아 농민 집단농장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