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성민경"
검색결과 총 37건
『경산집』은 조선 후기 문신·학자인 정원용의 한시와 산문을 엮은 시문집이다. 저자의 아들 정기세가 손수 편찬한 저자의 유고를 저자의 손자 정만조가 다시 20권으로 편차·교정하고, 부록으로 연보·행장·묘표·교서(敎書)·사제문(賜祭文)을 추가하여 1895년(고종 32)에 간행하였다. 원본 20권, 부록 3권, 합 23권 11책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와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에 있다.
경산집 (經山集)
『경산집』은 조선 후기 문신·학자인 정원용의 한시와 산문을 엮은 시문집이다. 저자의 아들 정기세가 손수 편찬한 저자의 유고를 저자의 손자 정만조가 다시 20권으로 편차·교정하고, 부록으로 연보·행장·묘표·교서(敎書)·사제문(賜祭文)을 추가하여 1895년(고종 32)에 간행하였다. 원본 20권, 부록 3권, 합 23권 11책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와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에 있다.
『계구암집』은 조선 후기 학자 윤형로의 시문집이다. 증손 윤수연(尹守淵)이 시문을 수집하고 편차하여 김병학(金炳學)과 김학성(金學性)의 서문을 받아 활자로 간행했다. 서문의 내용을 보아 1865년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4권 7책으로 120여 수의 시와 서(書)·변(辨)·차록(箚錄) 등을 수록하고 있다. 윤형로는 후재(厚齋) 김간(金榦)의 문하에 나아가 배웠고, 도암(陶菴) 이재(李縡)와도 사제 관계를 맺었다. 주희(朱熹)와 이이(李珥)의 정통성을 고수하는 입장이 문집 전반에 드러난다.
계구암집 (戒懼庵集)
『계구암집』은 조선 후기 학자 윤형로의 시문집이다. 증손 윤수연(尹守淵)이 시문을 수집하고 편차하여 김병학(金炳學)과 김학성(金學性)의 서문을 받아 활자로 간행했다. 서문의 내용을 보아 1865년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4권 7책으로 120여 수의 시와 서(書)·변(辨)·차록(箚錄) 등을 수록하고 있다. 윤형로는 후재(厚齋) 김간(金榦)의 문하에 나아가 배웠고, 도암(陶菴) 이재(李縡)와도 사제 관계를 맺었다. 주희(朱熹)와 이이(李珥)의 정통성을 고수하는 입장이 문집 전반에 드러난다.
『남계집』은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박세채의 시문집이다. 저자는 1689년 기사환국 이후 파주로 돌아온 뒤 수년 간 한거(閑居)하면서 자신의 시문을 산정해 놓았다. 이후 저자의 후손과 문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면서, 서로 입장을 달리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이 문집 간행을 둘러싸고 드났다. 그래서 문집은 결국 1732년에 이르러 조현명(趙顯命)에 의해 간행되었다. 본집은 정집 87권, 외집 16권, 속집 22권 합 56책이다. 맨 앞에 정집의 목록 2권 1책이 상·하로 실려 있다. 서문은 없다.
남계집 (南溪集)
『남계집』은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박세채의 시문집이다. 저자는 1689년 기사환국 이후 파주로 돌아온 뒤 수년 간 한거(閑居)하면서 자신의 시문을 산정해 놓았다. 이후 저자의 후손과 문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면서, 서로 입장을 달리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이 문집 간행을 둘러싸고 드났다. 그래서 문집은 결국 1732년에 이르러 조현명(趙顯命)에 의해 간행되었다. 본집은 정집 87권, 외집 16권, 속집 22권 합 56책이다. 맨 앞에 정집의 목록 2권 1책이 상·하로 실려 있다. 서문은 없다.
『두곡집(杜谷集)』은 조선시대 문인·학자 고응척의 시문집이다. 서와 발이 모두 없어 편집 경위와 필사 연도 등을 알 수 없다. 이 책은 필자의 고본(稿本)은 아니고 후대에 필사된 것이며, 지질 상태 등을 보아 적어도 100~200년 이전의 것으로 추측된다. 통문관 주인 이겸로가 소장하고 있다. 고응척은 조선 중기 영남 사림으로서, 평생 도학을 탐구한 도학자이다. 그의 작품 세계 역시 대체로 그가 궁구했던 도학적 이념과 깨달음을 표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두곡집 (杜谷集)
『두곡집(杜谷集)』은 조선시대 문인·학자 고응척의 시문집이다. 서와 발이 모두 없어 편집 경위와 필사 연도 등을 알 수 없다. 이 책은 필자의 고본(稿本)은 아니고 후대에 필사된 것이며, 지질 상태 등을 보아 적어도 100~200년 이전의 것으로 추측된다. 통문관 주인 이겸로가 소장하고 있다. 고응척은 조선 중기 영남 사림으로서, 평생 도학을 탐구한 도학자이다. 그의 작품 세계 역시 대체로 그가 궁구했던 도학적 이념과 깨달음을 표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만곡문집』은 조선 후기 학자 조술도의 시문집이다. 17권 9책으로 고려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의 조카인 조거신(趙居信)이 저자의 유문을 수습·정리하고,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에게 문집의 교정과 서문을 부탁하여 1821년에 간행했다. 조거신은 당쟁에 희생되어 유배지로 가던 중 죽은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의 손자로, 과거 시험에 뜻을 두지 않고 형제들과 학문에만 전념하며 초야(경상북도 영양 주실)에 묻혀 지냈다.
만곡문집 (晩谷文集)
『만곡문집』은 조선 후기 학자 조술도의 시문집이다. 17권 9책으로 고려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의 조카인 조거신(趙居信)이 저자의 유문을 수습·정리하고,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에게 문집의 교정과 서문을 부탁하여 1821년에 간행했다. 조거신은 당쟁에 희생되어 유배지로 가던 중 죽은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의 손자로, 과거 시험에 뜻을 두지 않고 형제들과 학문에만 전념하며 초야(경상북도 영양 주실)에 묻혀 지냈다.
『묵산문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남기만의 시문집이다. 저자의 시문은 저자의 종증손 남유운의 주도로 정리가 완료되었다. 남유운은 먼저 재정을 확보하고 저자의 족후손 남공수, 종현손 남고와 함께 가장되어 오던 저자의 유집을 산정하여 4권으로 편차한 후 유후조와 이휘재의 서를 붙여 1874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본은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묵산문집 (默山文集)
『묵산문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남기만의 시문집이다. 저자의 시문은 저자의 종증손 남유운의 주도로 정리가 완료되었다. 남유운은 먼저 재정을 확보하고 저자의 족후손 남공수, 종현손 남고와 함께 가장되어 오던 저자의 유집을 산정하여 4권으로 편차한 후 유후조와 이휘재의 서를 붙여 1874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본은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묵암문집』은 조선 후기 학자 허강의 시문집이다. 1879년(고종 16) 허훈의 편집을 거쳐 허육이 간행했으며, 부록은 1901년 허육이 편집, 간행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허강은 1792년(정조 16) 진사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뜻을 끊고 『주자대전』과 『퇴계전서』를 탐독하였으며, 입재 정종로를 사사하여 난의를 질문하였다.
묵암문집 (默庵文集)
『묵암문집』은 조선 후기 학자 허강의 시문집이다. 1879년(고종 16) 허훈의 편집을 거쳐 허육이 간행했으며, 부록은 1901년 허육이 편집, 간행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허강은 1792년(정조 16) 진사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뜻을 끊고 『주자대전』과 『퇴계전서』를 탐독하였으며, 입재 정종로를 사사하여 난의를 질문하였다.
『묵암집』은 조선 후기 학자 신구의 시문집이다. 저자의 유문은 손자 신식이 주도하여 수습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때 정리된 고본의 서문은 김이안이, 발문은 이민보가 작성하였다. 그러나 간행으로 이어지지는 못한 채 가장되었다. 현전하는 저자의 문집 내에 간행 경위를 자세히 밝힌 부분이 없어 간행 주체나 시기가 불분명하다. 다만 저자와 당색이 같은 인물들의 문집 중 저자의 문집과 글자체나 판심의 형태 등이 동일한 것들로 추정해 보면 저자의 문집 또한 전사자를 사용하여 19세기 중반 이후에 인행한 것으로 보인다.
묵암집 (默庵集)
『묵암집』은 조선 후기 학자 신구의 시문집이다. 저자의 유문은 손자 신식이 주도하여 수습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때 정리된 고본의 서문은 김이안이, 발문은 이민보가 작성하였다. 그러나 간행으로 이어지지는 못한 채 가장되었다. 현전하는 저자의 문집 내에 간행 경위를 자세히 밝힌 부분이 없어 간행 주체나 시기가 불분명하다. 다만 저자와 당색이 같은 인물들의 문집 중 저자의 문집과 글자체나 판심의 형태 등이 동일한 것들로 추정해 보면 저자의 문집 또한 전사자를 사용하여 19세기 중반 이후에 인행한 것으로 보인다.
『박정자유고』는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박태한의 시문집이다. 저자의 유문은 저자가 졸한 지 십여 년 후에 저자의 아우 박사한과 아들 박민수가 저자의 자편고(自編稿)를 바탕으로 산정, 편차하여 가장(家藏)하였다가 1730년경에 조카 박문수가 원집 14권 부록 2권 합 7책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본집은 원집 14권, 부록 2권 합 7책으로 되어 있다. 각 권별로 목록이 있으며 자주(自註)와 편자주(編者註)가 있다.
박정자유고 (朴正字遺稿)
『박정자유고』는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박태한의 시문집이다. 저자의 유문은 저자가 졸한 지 십여 년 후에 저자의 아우 박사한과 아들 박민수가 저자의 자편고(自編稿)를 바탕으로 산정, 편차하여 가장(家藏)하였다가 1730년경에 조카 박문수가 원집 14권 부록 2권 합 7책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본집은 원집 14권, 부록 2권 합 7책으로 되어 있다. 각 권별로 목록이 있으며 자주(自註)와 편자주(編者註)가 있다.
『박천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이옥의 시문집이다. 저자는 생전에 자신의 시문을 꾸준히 정리해 두고 있었는데, 저자 사후 초고를 정리하여 초본(草本)을 작성하는 작업은 저자의 장남 이만수와 차남 이만부가 주로 담당하였다. 이 문집은 경성도호부 판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삼남 이만유가 중형 이만부의 도움을 받아 1720년 무렵부터 판각을 시작하여 1721년 목판으로 간행을 완료한 것이다. 시집(詩集) 18권, 문집(文集) 8권, 보유(補遺) 5권, 별집(別集) 2권 합 5책이다.
박천집 (博泉集)
『박천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이옥의 시문집이다. 저자는 생전에 자신의 시문을 꾸준히 정리해 두고 있었는데, 저자 사후 초고를 정리하여 초본(草本)을 작성하는 작업은 저자의 장남 이만수와 차남 이만부가 주로 담당하였다. 이 문집은 경성도호부 판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삼남 이만유가 중형 이만부의 도움을 받아 1720년 무렵부터 판각을 시작하여 1721년 목판으로 간행을 완료한 것이다. 시집(詩集) 18권, 문집(文集) 8권, 보유(補遺) 5권, 별집(別集) 2권 합 5책이다.
『반곡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정경달의 시문집이다. 처음에 필사본이 있었지만 현전하지 않고, 한치응과 정약용의 서문과 가장(家藏) 문서류, 조부 정인걸의 행장 및 묘갈명 등이 더해져 총 9권 3책의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학문과 수양, 국가의 시무책을 논한 글들이 주목되며, 자연에서의 안빈낙도를 표현한 시와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비극적 실상을 사실적으로 전하는 시들이 실려 있다.
반곡집 (盤谷集)
『반곡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정경달의 시문집이다. 처음에 필사본이 있었지만 현전하지 않고, 한치응과 정약용의 서문과 가장(家藏) 문서류, 조부 정인걸의 행장 및 묘갈명 등이 더해져 총 9권 3책의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학문과 수양, 국가의 시무책을 논한 글들이 주목되며, 자연에서의 안빈낙도를 표현한 시와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비극적 실상을 사실적으로 전하는 시들이 실려 있다.
『반구당유고』는 조선 후기의 문신 유지화의 시문집이다. 유지화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호종하였으며, 척화론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나 계모를 지성으로 섬겨 이웃의 칭찬을 받았고, 1804년(순조 4) 효자의 정문이 세워졌다. 문집은 3권 2책으로, 1870년(고종 7) 후손 유환창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홍양호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7세손 유환권과 조석우의 발문이 있다.
반구당유고 (伴鷗堂遺稿)
『반구당유고』는 조선 후기의 문신 유지화의 시문집이다. 유지화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호종하였으며, 척화론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나 계모를 지성으로 섬겨 이웃의 칭찬을 받았고, 1804년(순조 4) 효자의 정문이 세워졌다. 문집은 3권 2책으로, 1870년(고종 7) 후손 유환창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홍양호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7세손 유환권과 조석우의 발문이 있다.
『상예회수』는 조선 후기에 홍석주, 홍길주, 홍현주 3형제가 우리나라와 중국의 명문장을 발췌하여 수록한 시문선집이다. 10권 5책의 활자본으로, 권두에 홍길주가 변문(騈文)으로 작성한 서문과 필자들의 약전이 있다. 규장각 도서 등에 있다.
상예회수 (象藝薈粹)
『상예회수』는 조선 후기에 홍석주, 홍길주, 홍현주 3형제가 우리나라와 중국의 명문장을 발췌하여 수록한 시문선집이다. 10권 5책의 활자본으로, 권두에 홍길주가 변문(騈文)으로 작성한 서문과 필자들의 약전이 있다. 규장각 도서 등에 있다.
『성호예설유편』은 조선 후기 학자 이익이 학자들과 교환한 서간문 중 예설에 관한 글을 모아 엮은 예서이다. 『가례(家禮)』의 편목에 맞추어 엮고, 여기에 다시 고증을 붙여 알기 쉽게 풀이하였다. 6권, 속집 합 7책의 필사본으로 필사한 연대를 알 수 없으며 서문과 발문도 없다. 이 책의 부록 및 편자가 덧붙인 의견을 통해 성호학파 예설의 계승 양상을 알 수 있다.
성호예설유편 (星湖禮說類編)
『성호예설유편』은 조선 후기 학자 이익이 학자들과 교환한 서간문 중 예설에 관한 글을 모아 엮은 예서이다. 『가례(家禮)』의 편목에 맞추어 엮고, 여기에 다시 고증을 붙여 알기 쉽게 풀이하였다. 6권, 속집 합 7책의 필사본으로 필사한 연대를 알 수 없으며 서문과 발문도 없다. 이 책의 부록 및 편자가 덧붙인 의견을 통해 성호학파 예설의 계승 양상을 알 수 있다.
『임호집』은 조선 후기 문신 박수검의 시문집이다. 현손 박상순(朴尙淳), 박문순(朴文淳)이 강화석(姜華錫)과 김선(金銑)에게 서문을 받아 1812년에 제천(堤川) 광암(廣巖)에서 활자로 인행하였다. 이 본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다. 6권 3책의 목활자본으로, 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호집 (林湖集)
『임호집』은 조선 후기 문신 박수검의 시문집이다. 현손 박상순(朴尙淳), 박문순(朴文淳)이 강화석(姜華錫)과 김선(金銑)에게 서문을 받아 1812년에 제천(堤川) 광암(廣巖)에서 활자로 인행하였다. 이 본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다. 6권 3책의 목활자본으로, 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타우유고』는 조선 후기 문신·학자 이상의 시문집이다. 저자의 시문은 기사년(1689) 옥사 때에 대부분 몰수되고 산일되어 가장유고(家藏遺稿)가 없었는데 사위 홍우전에 의해 처음으로 수집, 정리되었다. 이후 1743년에 종손인 이재가 승정원일기에서 저자의 소(疏)와 헌의(獻議)를 베껴내어 가장유고와 합쳐서 총 5권에 부록 1권으로 편차했다. 8대손 이하용 등이 1928년에 원집을 중간(重刊)했고, 빠진 저자의 시문을 모아 속집으로 편차한 후 원집과 함께 석인본으로 간행하였다.
타우유고 (打愚遺稿)
『타우유고』는 조선 후기 문신·학자 이상의 시문집이다. 저자의 시문은 기사년(1689) 옥사 때에 대부분 몰수되고 산일되어 가장유고(家藏遺稿)가 없었는데 사위 홍우전에 의해 처음으로 수집, 정리되었다. 이후 1743년에 종손인 이재가 승정원일기에서 저자의 소(疏)와 헌의(獻議)를 베껴내어 가장유고와 합쳐서 총 5권에 부록 1권으로 편차했다. 8대손 이하용 등이 1928년에 원집을 중간(重刊)했고, 빠진 저자의 시문을 모아 속집으로 편차한 후 원집과 함께 석인본으로 간행하였다.
『태을암문집』은 조선 후기 학자 신국빈의 시문집이다. 저자 사후 손자 신석린이 유적의 정리를 위해 문사들에게 묘도문을 받았는데, 유문의 정리와 수습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후 저자의 6대 사손 신현덕과 방계 후손 신현대가 가장(家藏)되어 오던 유고를 수습 정리하고 송준필의 서문을 받아 1944년 밀양에서 활자로 인행하였다. 저자는 젊어서는 당시(唐詩)에 뛰어나다는 명성으로 영남 지역에서 알려졌으며 72세의 노구로 과거에 합격하여 정조의 특별한 대우를 받은 미담으로 유명하였다.
태을암문집 (太乙菴文集)
『태을암문집』은 조선 후기 학자 신국빈의 시문집이다. 저자 사후 손자 신석린이 유적의 정리를 위해 문사들에게 묘도문을 받았는데, 유문의 정리와 수습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후 저자의 6대 사손 신현덕과 방계 후손 신현대가 가장(家藏)되어 오던 유고를 수습 정리하고 송준필의 서문을 받아 1944년 밀양에서 활자로 인행하였다. 저자는 젊어서는 당시(唐詩)에 뛰어나다는 명성으로 영남 지역에서 알려졌으며 72세의 노구로 과거에 합격하여 정조의 특별한 대우를 받은 미담으로 유명하였다.
『포저집』은 조선 후기 문신 조익의 시문집이다. 저자는 벼슬을 그만두고 신창(新昌)에 우거하면서 자신의 시문을 정리하여 두었는데, 아들 조복양이 문집으로 간행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그가 1671년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일이 중단되었다. 뒤를 이어 저자의 손자인 조지항(趙持恒)과 조지정(趙持正)이 가장(家藏) 문집과 초고 등을 35권으로 편차하여 1688년에 목판으로 『포저집』을 간행하였다. 인조·효종 무렵에 서인의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한 조익의 사상과 활동을 알 수 있는 중심적인 자료이다.
포저집 (浦渚集)
『포저집』은 조선 후기 문신 조익의 시문집이다. 저자는 벼슬을 그만두고 신창(新昌)에 우거하면서 자신의 시문을 정리하여 두었는데, 아들 조복양이 문집으로 간행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그가 1671년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일이 중단되었다. 뒤를 이어 저자의 손자인 조지항(趙持恒)과 조지정(趙持正)이 가장(家藏) 문집과 초고 등을 35권으로 편차하여 1688년에 목판으로 『포저집』을 간행하였다. 인조·효종 무렵에 서인의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한 조익의 사상과 활동을 알 수 있는 중심적인 자료이다.
『학주전집』은 조선 후기 문신 김홍욱의 시문집이다. 저자는 소현세자빈 강씨의 신원 회복을 청한 사건으로 옥사하고 삭탈관직되었다. 1718년(숙종 44) 8월 강씨의 신원 회복과 함께 저자가 이조판서로 증직된 시점에 초간본의 간행이 손자 김두벽(金斗壁)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후 7대손 김만재(金萬載) 등이 문집을 중간(重刊)하기로 계획하여 1871년(고종 8)에 이루어졌다. 이들은 8대손 김상유(金商裕) 등의 도움을 받아 구본을 교정하고, 일시(逸詩), 연보, 부록을 추보(追補)하여 새로 편차해서 15권 6책으로 정리하였다.
학주전집 (鶴洲全集)
『학주전집』은 조선 후기 문신 김홍욱의 시문집이다. 저자는 소현세자빈 강씨의 신원 회복을 청한 사건으로 옥사하고 삭탈관직되었다. 1718년(숙종 44) 8월 강씨의 신원 회복과 함께 저자가 이조판서로 증직된 시점에 초간본의 간행이 손자 김두벽(金斗壁)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후 7대손 김만재(金萬載) 등이 문집을 중간(重刊)하기로 계획하여 1871년(고종 8)에 이루어졌다. 이들은 8대손 김상유(金商裕) 등의 도움을 받아 구본을 교정하고, 일시(逸詩), 연보, 부록을 추보(追補)하여 새로 편차해서 15권 6책으로 정리하였다.
『홍애집』은 조선 후기 학자 이기원의 시문집이다. 현전하는 이기원의 저작은 모두 필사본으로 남아 있으며, 간행을 목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시집에는 1권부터 3권 중간까지 이덕무가 찍은 붉은 색 비점이 남아 있다. 시는 1,000수가 넘는 분량인데, 장편 고시가 많고 연작시도 많은 편이다. 시의 내용은 자신의 고단한 삶에서 우러나오는 한탄과 애상이 두드러진다. 산문은 편지글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자신이 지독한 가난과 질병에 고통받고 있다는 하소연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홍애집 (洪厓集)
『홍애집』은 조선 후기 학자 이기원의 시문집이다. 현전하는 이기원의 저작은 모두 필사본으로 남아 있으며, 간행을 목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시집에는 1권부터 3권 중간까지 이덕무가 찍은 붉은 색 비점이 남아 있다. 시는 1,000수가 넘는 분량인데, 장편 고시가 많고 연작시도 많은 편이다. 시의 내용은 자신의 고단한 삶에서 우러나오는 한탄과 애상이 두드러진다. 산문은 편지글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자신이 지독한 가난과 질병에 고통받고 있다는 하소연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