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애집』은 조선 후기 학자 이기원의 시문집이다. 현전하는 이기원의 저작은 모두 필사본으로 남아 있으며, 간행을 목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시집에는 1권부터 3권 중간까지 이덕무가 찍은 붉은 색 비점이 남아 있다. 시는 1,000수가 넘는 분량인데, 장편 고시가 많고 연작시도 많은 편이다. 시의 내용은 자신의 고단한 삶에서 우러나오는 한탄과 애상이 두드러진다. 산문은 편지글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자신이 지독한 가난과 질병에 고통받고 있다는 하소연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현전하는 이기원(李箕元)의 저작은 산문집인 『홍애문집(洪厓文集)』 6권 3책(총 8권 중 1·2권 낙질, 7권 일부 낙권), 시집인 『홍애시집(洪厓詩集)』 10권 5책(총 15권 중 7·8권 낙질, 15권 일부 주1), 자찬연보인 『홍애자편(洪厓自編)』 2권 1책 등이다. 모두 필사본으로 남아 있으며, 간행을 목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홍애자편』에는 1791년(정조 15)에 쓴 저자의 자서가 있고, 『홍애시집』에도 자서가 남아 있다. 시집 1권부터 3권 중간까지 이덕무가 찍은 붉은색 비점이 남아 있다.
시(詩) 권1∼12에 시 1,068수, 문(文) 권1∼3에 기(記) 7편, 변(辨) 1편, 서(書) 5편, 발(跋) 5편, 설(說) 5편, 격문 1편, 전(傳) 2편, 명(銘) 1편, 문(文) 2편, 혼서 1편, 상량문(上樑文) 1편, 서(序) 3편, 대책 1편, 제문(祭文) 1편, 부록 권1·2로 구성되어 있다.
시집에 실린 작품의 형식적 특징은 우선 장편 고시가 많다는 점이다. 또 한 제목 아래 여러 편의 연작시를 지은 경우도 다른 작가들에 비해 월등하게 많다. 내용상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점은 자신의 고단한 삶에서 우러나오는 한탄과 애상이다. 「기몽(記夢)」 · 「침상서회(枕上書懷)」에는 시와 학문에 대한 애착심이 진솔하게 그려져 있다. 「복거(卜居)」 · 「출교(出郊)」에는 한가하고 소박하며 주2 농촌의 정경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그밖에 「한식(寒食)」 · 「제석(除夕)」 · 「동지(冬至)」는 계절의 변화에 따른 감회를 읊은 시다.
현재 문집에 남아 있는 문장 수는 모두 75편인데 주로 편지글인 서(書)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편지글은 대부분 자신이 지독한 가난과 질병에 고통받고 있다는 하소연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변의 「청어부주변(靑魚不走辨)」은 흔하고 값싸던 청어가 지금 품귀 현상을 보이는 현상에 대해 사람들이 ‘근래에 연경 시장에 청어가 쌓였다는데 우리나라의 청어가 중국 바다로 달려가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 말이 엉터리라는 것을 알고 저자가 한 늙은 어부에게 묻는 내용이다. 어부는 균역법이 시행되어 어부들이 이익을 잃게 되자 박쥐처럼 직업을 왔다갔다하면서 물고기를 잡지 않아서 그렇다고 설명을 해 주었다. 저자는 이에 느끼는 바가 있어 글을 지은 것이다.
설 가운데 「승설(繩說)」에서는 한가한 때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를 꼬아 보니, 처음에는 잘 알지 못하겠더니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노 뭉치가 커지는 것이 눈에 띈다고 하면서, 공부하는 것을 그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동호삼일기(東湖三日記)」는 강원도관찰사의 막부에 번관(燔官)으로 차출된 뒤 임무 수행을 위해 3일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보고 들은 일들을 적은 것이다. 「갈전격(葛戰檄)」은 이웃해 있는 고을인 신녕(新寧)과 장수(長水)가 매년 정월 보름이면 칡싸움을 하는 풍습이 있는데, 이것을 실제 전쟁 상황에 빗대 격문을 지은 것이다. 원래 격문의 격식대로 주3이다. 「침상명(寢牀銘)」은 소박하게 안빈낙도하는 삶을 노래한 4언 14구, 상성(上聲) 침운(寢韻)의 명이다. 「전사첩발(田舍帖跋)」은 아들을 공부시키는 여가에 그림 공부를 시키는데 재료로 삼을 게 없어서 손수 종이로 첩을 만들고 살고 있는 전사를 그려서 사계절을 분배해 주4 한 구절씩을 붙여 시골에서 공부의 지남(指南)이 되기를 바라면서 쓴 글이다.
서(書) 가운데 「상윤판서서(上尹判書書)」는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에게 보낸 글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사항을 비롯해 사대교린(事大交隣) · 군정(軍政) · 풍속 등에 대한 의견을 진술하였다. 「열녀달성서씨전(烈女達城徐氏傳)」은 풍기에 사는 영락 15년(1417)에 태어난 서은달(徐恩達)의 딸에 대한 전기이다. 그는 시집간 지 한 해도 못되어 남편이 죽자 생전 세수와 빗질을 하지 않으며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고 수시로 묘를 바라보며 곡을 하였는데, 눈물이 떨어진 곳에 하얀 대나무 서너 그루가 자라더니 7, 8 그루가 되었다. 조정에까지 이 소문이 들려 세종 대왕이 그 대나무를 그려 올리라 하고 정려각을 세워주었으며 친히 그를 칭송하는 시 두 수를 지어 내려주었다. 10세 후손이 정려각을 중수하고 글을 부탁하여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