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정인성"
검색결과 총 24건
대구팔달동유적은 대구광역시 북구 팔달동 일대에 있는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를 아우르는 복합유적이다. 금호강과 팔계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언덕 비탈면에 조성된 대규모 유적이다. 청동기시대 주거지, 원삼국시대 나무널무덤 · 널무덤 · 덧널무덤 · 독무덤, 삼국시대 덧널무덤 · 돌덧널무덤과 조선시대 유구도 일부 포함하여 다양한 성격의 유구가 확인된다. 출토 유물로는 초기 철기시대에서 원삼국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토기류와 금속류가 수습되었다. 대구·경북 지역의 삼한시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표지 유적이라는 의의가 있다.
대구 팔달동 유적 (大邱 八達洞 遺蹟)
대구팔달동유적은 대구광역시 북구 팔달동 일대에 있는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를 아우르는 복합유적이다. 금호강과 팔계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언덕 비탈면에 조성된 대규모 유적이다. 청동기시대 주거지, 원삼국시대 나무널무덤 · 널무덤 · 덧널무덤 · 독무덤, 삼국시대 덧널무덤 · 돌덧널무덤과 조선시대 유구도 일부 포함하여 다양한 성격의 유구가 확인된다. 출토 유물로는 초기 철기시대에서 원삼국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토기류와 금속류가 수습되었다. 대구·경북 지역의 삼한시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표지 유적이라는 의의가 있다.
동외동패총은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동외리에 있는 삼한시대 대외 교섭의 지역 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취락유적이다. 1914년 도리이 류조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이후 국립중앙박물관과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여러 종류의 유구와 유물들을 발견하였다. 특히 일본에서 반입된 야요이 후기(2-3세기)의 토기 굽다리접시류가 출토된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동외동패총이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 장거리 대외 교류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자료이다.
동외동 패총 (東外洞 貝塚)
동외동패총은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동외리에 있는 삼한시대 대외 교섭의 지역 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취락유적이다. 1914년 도리이 류조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이후 국립중앙박물관과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여러 종류의 유구와 유물들을 발견하였다. 특히 일본에서 반입된 야요이 후기(2-3세기)의 토기 굽다리접시류가 출토된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동외동패총이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 장거리 대외 교류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자료이다.
봉산송산리고분(鳳山松山里古墳)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벽돌무덤 · 덧널무덤으로 이루어진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1917년 송산리 제1호분이라는 이름으로 야쓰이 세이이쓰에 의해 조사되었으나 정식 보고는 되지 않았으며, 광복 이후 북한이 봉산송산리고분에서 발굴한 덧널무덤이 동일한 고분군인지는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송산리에서 덧널무덤과 벽돌무덤이 발견된 점은 대방군 지역으로 이해되는 봉산군 일대의 주요 무덤 형태와 일치하고 있다. 대방군치지라 알려진 고당성 동북쪽에 있어 대방군 관련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산 송산리 고분 (鳳山 松山里 古墳)
봉산송산리고분(鳳山松山里古墳)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벽돌무덤 · 덧널무덤으로 이루어진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1917년 송산리 제1호분이라는 이름으로 야쓰이 세이이쓰에 의해 조사되었으나 정식 보고는 되지 않았으며, 광복 이후 북한이 봉산송산리고분에서 발굴한 덧널무덤이 동일한 고분군인지는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송산리에서 덧널무덤과 벽돌무덤이 발견된 점은 대방군 지역으로 이해되는 봉산군 일대의 주요 무덤 형태와 일치하고 있다. 대방군치지라 알려진 고당성 동북쪽에 있어 대방군 관련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산양동리고분군(鳳山養洞里古墳群)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1917년과 1922년에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으나 전모가 알려진 것은 양동리 3 · 5호분이다. 양동리 3 · 5호분은 방대형 분구와 궁륭형 천장의 전형적인 낙랑계 벽돌무덤이다. 출토된 각종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피장자는 군현에서 활동한 인물로 추정된다. 무덤의 구조나 토기의 양상으로 보아 양동리 3 · 5호분의 추정 연대는 3세기 전반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지역에 축조된 벽돌무덤의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봉산 양동리 고분군 (鳳山 養洞里 古墳群)
봉산양동리고분군(鳳山養洞里古墳群)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1917년과 1922년에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으나 전모가 알려진 것은 양동리 3 · 5호분이다. 양동리 3 · 5호분은 방대형 분구와 궁륭형 천장의 전형적인 낙랑계 벽돌무덤이다. 출토된 각종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피장자는 군현에서 활동한 인물로 추정된다. 무덤의 구조나 토기의 양상으로 보아 양동리 3 · 5호분의 추정 연대는 3세기 전반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지역에 축조된 벽돌무덤의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봉산입봉리고분군(鳳山立峯里古墳群)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대방군의 무덤으로 알려진 덧널무덤이다. 1917년 야쓰이 세이이쓰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이를 입봉리 9호고분이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입봉리에 있는 고분에 일련번호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유물은 모두 토기류인데 그 중에서 석영혼입계 백색토기 항아리가 출토된 점에서 유적의 연대는 대방군 설치 이전의 시기인 1세기 중엽으로 소급된다.
봉산 입봉리 고분군 (鳳山 立峯里 古墳群)
봉산입봉리고분군(鳳山立峯里古墳群)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대방군의 무덤으로 알려진 덧널무덤이다. 1917년 야쓰이 세이이쓰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이를 입봉리 9호고분이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입봉리에 있는 고분에 일련번호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유물은 모두 토기류인데 그 중에서 석영혼입계 백색토기 항아리가 출토된 점에서 유적의 연대는 대방군 설치 이전의 시기인 1세기 중엽으로 소급된다.
부조예군묘(夫租薉君墓)는 평양직할시 낙랑구역 정백동에 있는 예맥족 군장 부조예군의 덧널무덤이다. 발견 당시 봉분과 무덤 내부가 거의 파괴되어 있었으나,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단장 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발굴 결과 세형동검을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 중에는 부조예군을 새긴 은제 도장이 출토되어 피장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세형동검 문화의 전통을 유지한 덧널무덤이라는 점에서 서기전 1세기 대 낙랑군의 치하에 있던 고조선 후기 토착 세력의 모습을 보여 주는 무덤으로 주목된다.
부조예군묘 (夫租薉君墓)
부조예군묘(夫租薉君墓)는 평양직할시 낙랑구역 정백동에 있는 예맥족 군장 부조예군의 덧널무덤이다. 발견 당시 봉분과 무덤 내부가 거의 파괴되어 있었으나,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단장 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발굴 결과 세형동검을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 중에는 부조예군을 새긴 은제 도장이 출토되어 피장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세형동검 문화의 전통을 유지한 덧널무덤이라는 점에서 서기전 1세기 대 낙랑군의 치하에 있던 고조선 후기 토착 세력의 모습을 보여 주는 무덤으로 주목된다.
'영천어은동유적'은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에 있는 한경 · 방제경 등 각종 청동기가 출토된 원삼국시대 유적이다. 금호강 남쪽 기슭의 언덕 비탈면에 자리하며, 원삼국시대의 널무덤으로 추정된다. 1918년 토사가 붕괴된 자리에서 다량의 청동기가 발견되면서 알려졌다. 이 유적은 '대구평리동유적', '경주조양동유적' 등 영남 일대에서 발견되는 유적들과 맥을 같이하는데, 중국, 일본 등과 원거리 무역을 한 금호강 일대 대외 교류의 중심지로서 주목된다.
영천 어은동 유적 (永川 漁隱洞 遺蹟)
'영천어은동유적'은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에 있는 한경 · 방제경 등 각종 청동기가 출토된 원삼국시대 유적이다. 금호강 남쪽 기슭의 언덕 비탈면에 자리하며, 원삼국시대의 널무덤으로 추정된다. 1918년 토사가 붕괴된 자리에서 다량의 청동기가 발견되면서 알려졌다. 이 유적은 '대구평리동유적', '경주조양동유적' 등 영남 일대에서 발견되는 유적들과 맥을 같이하는데, 중국, 일본 등과 원거리 무역을 한 금호강 일대 대외 교류의 중심지로서 주목된다.
영흥소라리유적은 함경남도 금야군에 있는 화려현의 치소로 추정되는 토성과 집터 · 무덤 등이 포함된 복합유적이다. 일제강점기 세키노 다다시에 의해 처음 조사되었으며, 광복 이후 북한에서 몇 차례 조사한 바가 있다. 다수의 낙랑계 청동 제품과 철 제품이 출토되었으며, 유물로는 세형동검의 검파두식과 동촉, 철부, 마구류 등의 철 제품이 확인된다. 영흥소라리유적은 한국식 동검 문화의 기반 위에 철기 문화와 중국 한대 문화의 복합된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영흥 소라리 유적 (永興 所羅里 遺蹟)
영흥소라리유적은 함경남도 금야군에 있는 화려현의 치소로 추정되는 토성과 집터 · 무덤 등이 포함된 복합유적이다. 일제강점기 세키노 다다시에 의해 처음 조사되었으며, 광복 이후 북한에서 몇 차례 조사한 바가 있다. 다수의 낙랑계 청동 제품과 철 제품이 출토되었으며, 유물로는 세형동검의 검파두식과 동촉, 철부, 마구류 등의 철 제품이 확인된다. 영흥소라리유적은 한국식 동검 문화의 기반 위에 철기 문화와 중국 한대 문화의 복합된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와질토기(瓦質土器)는 실내가마에서 900℃ 정도의 고온에서 구워 낸 원삼국시대 영남 지역에서 유행한 회색의 약간 무른 토기이다. 태토의 정선화, 타날성형, 환원염 소성으로 구워지는 점 등이 와질토기의 특징으로 인정되며, 대표적인 기종으로는 주머니호, 조합우각형 파수부장경호, 외반구연옹, 파수부호, 장동호, 타날문단경호가 있다. 와질토기 기원은 전국시대 회도 혹은 낙랑토기가 남하하면서 전래되었다는 외부기원설이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다. 최근에는 낙랑군 설치 이전에 고조선 토기 문화의 영향으로 자체적으로 발생했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와질토기 (瓦質土器)
와질토기(瓦質土器)는 실내가마에서 900℃ 정도의 고온에서 구워 낸 원삼국시대 영남 지역에서 유행한 회색의 약간 무른 토기이다. 태토의 정선화, 타날성형, 환원염 소성으로 구워지는 점 등이 와질토기의 특징으로 인정되며, 대표적인 기종으로는 주머니호, 조합우각형 파수부장경호, 외반구연옹, 파수부호, 장동호, 타날문단경호가 있다. 와질토기 기원은 전국시대 회도 혹은 낙랑토기가 남하하면서 전래되었다는 외부기원설이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다. 최근에는 낙랑군 설치 이전에 고조선 토기 문화의 영향으로 자체적으로 발생했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왕경묘(王卿墓)는 황해남도 신천군 새길리에 있는 대방군 장잠현 현장 왕경의 무덤으로 알려진 벽돌덧널무덤이다. 1962년 농업협동조합에서 진행한 건설공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네 벽과 바닥은 벽돌로 쌓은 반면, 천장은 널돌로 편평하게 덮여 있는 점은 고구려 돌방무덤과 비슷한 점이 있어 벽돌방무덤에서 돌방무덤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형태로 판단되기도 한다. 무덤에서 발견된 묘지명 벽돌에서는 '장잠현(守長岑) 현장(縣長) 왕경(王卿)'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대방군 장잠현의 위치 비정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왕경묘 (王卿墓)
왕경묘(王卿墓)는 황해남도 신천군 새길리에 있는 대방군 장잠현 현장 왕경의 무덤으로 알려진 벽돌덧널무덤이다. 1962년 농업협동조합에서 진행한 건설공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네 벽과 바닥은 벽돌로 쌓은 반면, 천장은 널돌로 편평하게 덮여 있는 점은 고구려 돌방무덤과 비슷한 점이 있어 벽돌방무덤에서 돌방무덤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형태로 판단되기도 한다. 무덤에서 발견된 묘지명 벽돌에서는 '장잠현(守長岑) 현장(縣長) 왕경(王卿)'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대방군 장잠현의 위치 비정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왕우묘(王旴墓)는 평양직할시 락랑구역 석암동에 있는 왕우의 무덤으로 알려진 낙랑군의 귀틀무덤이다. 일명 '대동석암리205호분'이라고도 한다. 1925년 도쿄제국대학 문학부의 사업으로 발굴이 실시되었다. 동혈합장 귀틀무덤으로 출토 유물은 토기류, 금공품류, 청동기류, 칠기류로 세분할 수 있다. 특히 왕우인신(王旴印信)이 새겨진 목제 양면인이 출토되어 무덤의 주인공이 왕우임을 알 수 있다. 무덤의 형식과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보면, 1세기 중반에 조영되어 1세기 후반까지 세 번의 추가장이 이루어진 낙랑 최고위급 인물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왕우묘 (王旴墓)
왕우묘(王旴墓)는 평양직할시 락랑구역 석암동에 있는 왕우의 무덤으로 알려진 낙랑군의 귀틀무덤이다. 일명 '대동석암리205호분'이라고도 한다. 1925년 도쿄제국대학 문학부의 사업으로 발굴이 실시되었다. 동혈합장 귀틀무덤으로 출토 유물은 토기류, 금공품류, 청동기류, 칠기류로 세분할 수 있다. 특히 왕우인신(王旴印信)이 새겨진 목제 양면인이 출토되어 무덤의 주인공이 왕우임을 알 수 있다. 무덤의 형식과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보면, 1세기 중반에 조영되어 1세기 후반까지 세 번의 추가장이 이루어진 낙랑 최고위급 인물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요령연화보유적'은 중국 요령성 무순시 연화보에 있는 철기시대 집터 및 토기 · 철기 · 화폐 등이 발굴된 유물산포지이다. 우리나라 철기 문화의 개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으로, 1959년 라이닝성박물관에서 고고학 조사를 하던 중 최초로 발견되었다. 고조선 문화를 바탕으로 전국시대 연나라의 문화가 혼입되는 양상이 '위원용연동유적'과도 동일하며, 이 지역의 물질 문화를 묶어서 '세죽리-연화보 유형'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그 조영 주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요령 연화보 유적 (遼寧 蓮花堡 遺蹟)
'요령연화보유적'은 중국 요령성 무순시 연화보에 있는 철기시대 집터 및 토기 · 철기 · 화폐 등이 발굴된 유물산포지이다. 우리나라 철기 문화의 개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으로, 1959년 라이닝성박물관에서 고고학 조사를 하던 중 최초로 발견되었다. 고조선 문화를 바탕으로 전국시대 연나라의 문화가 혼입되는 양상이 '위원용연동유적'과도 동일하며, 이 지역의 물질 문화를 묶어서 '세죽리-연화보 유형'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그 조영 주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은파금대리유적은 황해북도 은파군 금대리에 있는 낙랑 널무덤과 고구려의 돌방무덤 등으로 구성된 무덤군이다. 1호분은 널무덤으로 분형은 알 수 없으나 덧널무덤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2 · 3호분은 석회암 판돌을 깔았던 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로 철기를 비롯하여 백색토기, 화분형토기, 꼰무늬가 타날된 납작바닥항아리, 짧은목항아리 등이 있는데, 이는 낙랑의 분묘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2 · 3호분의 무덤 구조가 벽돌무덤이 아닌 돌방무덤을 구축한 점에서 고구려에 의해 조영된 무덤군으로 이해된다.
은파 금대리 유적 (銀波 金大里 遺蹟)
은파금대리유적은 황해북도 은파군 금대리에 있는 낙랑 널무덤과 고구려의 돌방무덤 등으로 구성된 무덤군이다. 1호분은 널무덤으로 분형은 알 수 없으나 덧널무덤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2 · 3호분은 석회암 판돌을 깔았던 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로 철기를 비롯하여 백색토기, 화분형토기, 꼰무늬가 타날된 납작바닥항아리, 짧은목항아리 등이 있는데, 이는 낙랑의 분묘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2 · 3호분의 무덤 구조가 벽돌무덤이 아닌 돌방무덤을 구축한 점에서 고구려에 의해 조영된 무덤군으로 이해된다.
장무이묘(張撫夷墓)는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대방군 태수 장무이의 벽돌방무덤이다. 봉산군에서 문자벽돌이 채집되면서 주민들 사이에서 도총이라고 불리던 무덤에 대하여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1911년 최초로 조사를 실시하었다. 부장 유물은 이미 도굴되어 거의 남지 않았는데, 문자벽돌이 발견되어 무덤의 주인이 장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피장자는 낙랑 · 대방군의 멸망과 함께 망명하여 허호를 받은 중국계 인물로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장무이묘는 고구려에 의해 4세기 중엽경에 축조된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장무이 묘 (張撫夷 墓)
장무이묘(張撫夷墓)는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대방군 태수 장무이의 벽돌방무덤이다. 봉산군에서 문자벽돌이 채집되면서 주민들 사이에서 도총이라고 불리던 무덤에 대하여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1911년 최초로 조사를 실시하었다. 부장 유물은 이미 도굴되어 거의 남지 않았는데, 문자벽돌이 발견되어 무덤의 주인이 장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피장자는 낙랑 · 대방군의 멸망과 함께 망명하여 허호를 받은 중국계 인물로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장무이묘는 고구려에 의해 4세기 중엽경에 축조된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평양용추동고분(平壤龍秋洞古墳)은 평양직할시 룡성구역에 있는 고조선 후기의 덧널무덤이다. 덧널의 북쪽이 부장칸이 되는 전형적인 단장 덧널무덤의 구조이다. 출토된 유물이 명기화된 점에서 늦은 시기의 구덩무덤으로 파악된다. 평양용추동고분 덧널무덤의 존재는 대동강 남쪽 기슭에 집중되는 전형적인 덧널무덤의 전체적인 분포 범위를 시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여기서 출토된 나무칼과 칼집의 형태는 진한 사회의 대구팔달동유적과 유사한 점이 있어 양 지역 간에는 상호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 용추동 고분 (平壤 龍秋洞 古墳)
평양용추동고분(平壤龍秋洞古墳)은 평양직할시 룡성구역에 있는 고조선 후기의 덧널무덤이다. 덧널의 북쪽이 부장칸이 되는 전형적인 단장 덧널무덤의 구조이다. 출토된 유물이 명기화된 점에서 늦은 시기의 구덩무덤으로 파악된다. 평양용추동고분 덧널무덤의 존재는 대동강 남쪽 기슭에 집중되는 전형적인 덧널무덤의 전체적인 분포 범위를 시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여기서 출토된 나무칼과 칼집의 형태는 진한 사회의 대구팔달동유적과 유사한 점이 있어 양 지역 간에는 상호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정백동고분군(平壤貞柏洞古墳群)은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 있는 나무널무덤 · 덧널무덤 · 귀틀무덤 · 벽돌무덤 · 독널무덤 등 다양한 묘제가 산재하는 낙랑 시기의 무덤군이다. 1909년 세키노 다다시에 의해 발굴되면서 일찍이 그 중요성이 인지되었고, 광복 이후에도 1990년대까지 수천 개의 낙랑고분이 발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전모는 밝혀지지 않았다. 평양정백동고분군은 낙랑토성과 함께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서북한 지역에 분포하는 고분 문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유적 중 하나이다.
평양 정백동 고분군 (平壤 貞柏洞 古墳群)
평양정백동고분군(平壤貞柏洞古墳群)은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 있는 나무널무덤 · 덧널무덤 · 귀틀무덤 · 벽돌무덤 · 독널무덤 등 다양한 묘제가 산재하는 낙랑 시기의 무덤군이다. 1909년 세키노 다다시에 의해 발굴되면서 일찍이 그 중요성이 인지되었고, 광복 이후에도 1990년대까지 수천 개의 낙랑고분이 발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전모는 밝혀지지 않았다. 평양정백동고분군은 낙랑토성과 함께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서북한 지역에 분포하는 고분 문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유적 중 하나이다.
평양정오동고분군(平壤貞梧洞古墳群)은 평양직할시 락랑구역 정오동 일대에 있는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조사가 되기 시작하였으나 발굴 내용이 구체적으로 알려진 무덤은 10여 기 정도로 덧널무덤이 대부분이다. 개별 무덤의 성격과 출토 유물은 기본적으로 평양정백동고분군과 비슷한 점이 많다. 특히 덧널 내 피장자의 성별을 구별할 수 있는 복식 유물이 등장하여 성별에 따라 부장품의 구성과 위계가 달라진 점은 주목할 만하다. 덧널무덤에서 벽돌무덤으로의 이행 과정이 잘 나타나 있는 무덤군이다.
평양 정오동 고분군 (平壤 貞梧洞 古墳群)
평양정오동고분군(平壤貞梧洞古墳群)은 평양직할시 락랑구역 정오동 일대에 있는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조사가 되기 시작하였으나 발굴 내용이 구체적으로 알려진 무덤은 10여 기 정도로 덧널무덤이 대부분이다. 개별 무덤의 성격과 출토 유물은 기본적으로 평양정백동고분군과 비슷한 점이 많다. 특히 덧널 내 피장자의 성별을 구별할 수 있는 복식 유물이 등장하여 성별에 따라 부장품의 구성과 위계가 달라진 점은 주목할 만하다. 덧널무덤에서 벽돌무덤으로의 이행 과정이 잘 나타나 있는 무덤군이다.
평양토성리고분군(平壤土城洞古墳群)은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 있는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낙랑구역 내 다른 무덤군처럼 덧널무덤과 벽돌무덤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그 이행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45호에서 출토된 후한 대의 시유도기는 낙랑군에 다양한 출신의 인물들이 거주하였으며 귀향하지 않고 현지에 묻힌 사례도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무덤군은 기년명과 청동거울, 그리고 상한연대가 알려진 토기류의 출토를 통해 이 시기에 축조된 고분들의 조영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학술적 의의가 있다.
평양 토성리 고분군 (平壤 土城里 古墳群)
평양토성리고분군(平壤土城洞古墳群)은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 있는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낙랑구역 내 다른 무덤군처럼 덧널무덤과 벽돌무덤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그 이행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45호에서 출토된 후한 대의 시유도기는 낙랑군에 다양한 출신의 인물들이 거주하였으며 귀향하지 않고 현지에 묻힌 사례도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무덤군은 기년명과 청동거울, 그리고 상한연대가 알려진 토기류의 출토를 통해 이 시기에 축조된 고분들의 조영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학술적 의의가 있다.
황주금석리유적(黃州金石里遺蹟)은 황해북도 황주군 금석리에 있는 낙랑군 설치 직후 조영된 덧널무덤이다. 덧널무덤 바닥에서 쇠뇌 방아쇠, 세형동검, 청동 고리 등 각종 청동기를 비롯하여 철제 차축두, 쇠투겁창, 단조 쇠도끼 등 철기와 함께 재지적 성격이 강한 승문타날 짧은목항아리가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로 보아 피장자는 재지의 상위계층 인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몇몇 청동기가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볼 수 있어 낙랑군이 설치된 직후에 조영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황주 금석리 유적 (黃州 金石里 遺蹟)
황주금석리유적(黃州金石里遺蹟)은 황해북도 황주군 금석리에 있는 낙랑군 설치 직후 조영된 덧널무덤이다. 덧널무덤 바닥에서 쇠뇌 방아쇠, 세형동검, 청동 고리 등 각종 청동기를 비롯하여 철제 차축두, 쇠투겁창, 단조 쇠도끼 등 철기와 함께 재지적 성격이 강한 승문타날 짧은목항아리가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로 보아 피장자는 재지의 상위계층 인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몇몇 청동기가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볼 수 있어 낙랑군이 설치된 직후에 조영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완주 갈동 출토 동검동과 거푸집 일괄은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이서면 반교리 길동 유적에서 출토된 초기 철기시대의 동검, 동과 거푸집 2점이다. 이 거푸집은 세형동검, 세형동과를 주조하기 위해 제작되었고 새겨진 세형동검의 형태를 통해 2점이 한 짝인 것으로 보인다. 공반된 청동기, 점토대토기, 주조 철기들로 보아 서기전 3세기~서기전 2세기의 유물로 판단된다. 2019년 6월 26일 보물로 지정되었고,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완주 갈동 출토 동검동과 거푸집 일괄 (完州 葛洞 出土 銅劍銅과 거푸집 一括)
완주 갈동 출토 동검동과 거푸집 일괄은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이서면 반교리 길동 유적에서 출토된 초기 철기시대의 동검, 동과 거푸집 2점이다. 이 거푸집은 세형동검, 세형동과를 주조하기 위해 제작되었고 새겨진 세형동검의 형태를 통해 2점이 한 짝인 것으로 보인다. 공반된 청동기, 점토대토기, 주조 철기들로 보아 서기전 3세기~서기전 2세기의 유물로 판단된다. 2019년 6월 26일 보물로 지정되었고,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