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계량(季良), 호는 약파(藥坡). 할아버지는 감사(監司) 남훤(南翧)고, 아버지는 남상훈(南尙熏)이며, 어머니는 교리를 지낸 이행원(李行源)의 딸이다.
1694년(숙종 2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을 거쳐 홍문관에 들어갔다. 1704년(숙종 30) 수찬으로 있으면서, 조정에서 박세당(朴世堂)이 지은 『사변록(思辨錄)』을 모두 불태워버리려 하자 그것의 옳지 못함을 극력 상소하였고, 이듬해에는 남구만(南九萬)·유상운(柳尙運)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왕의 신임이 두터워 오랫동안 승지로 재임하였고, 1717년(숙종 43)에는 예조참판으로 동지부사에 발탁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2년(경종 2) 왕이 노론(老論) 4대신의 사사(賜死)를 감형하려 하자 승지로 있으면서 그 불가함을 동료들과 함께 역설하였다.
그 뒤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소론의 거두 김일경(金一鏡)을 변명하는 한편, 노론의 축출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이 집권하자 한때 관작을 삭탈당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 죄인을 4대문 밖으로 쫓아냄)되었으나, 1727년(영조 3)에 다시 서용되어 경기도관찰사·병조참판을 거쳐 지돈녕부사를 지냈다. 영조조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