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이곳이 중국의 금릉(金陵)과 비슷한 자연환경으로 북에는 봉황대(鳳凰臺)가 있으며, 서에는 황악산(黃嶽山)이 고찰 직지사(直指寺)를 안고 있는 깊숙하고 깨끗한 곳으로 산수가 아름답다하여, 전선기(全善基)가 선조인 시인 전만령(全萬齡)을 위해 건립한 정자이다.
현액(懸額)은 송시열(宋時烈)이 지명인 미곡(米谷)과 음을 같게 하고, 길재(吉再)의 채미정(採薇亭)에서 ‘薇’자를 따서 전씨 선조들의 높은 기풍을 상징하여 지었다. 뒤에 송환기(宋煥箕)가 시를 지어 미곡정사를 빛냈고, 1948년 퇴락한 정사를 다시 재건하였으며, 중수기를 송시헌(宋始憲)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