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용산동 고인돌군 ( 고인돌)

선사문화
유적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에 있었던 청동기시대 축조된 7기의 고인돌군. 지석묘군.
목차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에 있었던 청동기시대 축조된 7기의 고인돌군. 지석묘군.
내용

금호강 상류의 지류인 자양천(紫陽川) 가에 형성되어 있는 선상지에 7기가 있었다. 1980년 이후 저수지가 건설되면서 수몰되었으나, 발굴정리조사가 1978년 8월에 이루어져 내용이 밝혀졌다.

고인돌 7기의 배치는 제1호에서 제6호까지는 남북 35m, 동서 2m 넓이 안에 모여 있었다. 제7호 고인돌만 이 곳에서 80m 가량 떨어진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유구의 형태는 제1호 고인돌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머리만한 크기의 할석(割石)이나 냇돌[川石]을 생토층(生土層) 위에 쌓은 다음 그 위에 지석(支石) 없이 상석(上石)만을 얹어둔 형식이다.

제1호 고인돌에서는 생토층 위에 소형의 석관을 마련하고, 그 둘레에 크고 작은 돌을 같은 높이로 한 벌 깔아 두었다. 소형의 석관은 평면상으로는 장방형이고 이암판석(泥巖板石) 4개를 세워 상자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크기는 동서 길이 40㎝, 남북 너비 15㎝, 높이 10㎝되는 매우 작은 규모이며 뚜껑돌은 없다.

제1호 고인돌의 상석은 발굴 당시 석관에서 1.5m 떨어져서 위치하고 있었다. 이는 경지정리를 하느라고 이동되었다고 하므로 원래의 위치나 석관과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석관 둘레에 깔려 있는 돌은 석관의 북쪽 3.2m 위치에 동서로 향한 적석층의 경계석렬(境界石列)이 있고, 또 동쪽 4m 위치에 남북으로 향한 경계석렬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석관을 가운데에 두고 그 둘레에 방형구역으로 돌을 깔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의의와 평가

석관 속에서나 주변에서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서 세골장을 한 고인돌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영천용산동지석묘발굴조사보고서』(영천군, 1978)
집필자
윤용진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