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공산현령, 사헌부집의, 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원례(元禮)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16년(광해군 8)
사망 연도
미상
본관
밀양(密陽)
주요 관직
나주목사|사간원헌납|공산현령|사헌부집의|승지
정의
조선 후기에, 공산현령, 사헌부집의, 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원례(元禮). 박효제(朴孝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선(朴選)이고, 아버지는 박민행(朴敏行)이며, 어머니는 윤형언(尹衡彦)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62년(현종 3) 전생봉사(典牲奉事)로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68년 나주목사(羅州牧使)를 거쳐, 1670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정언을 거쳐 이듬해 다시 장령이 되고, 이어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을 역임하였다.

언관으로서 동료인 사간(司諫) 심유(沈攸), 정언 강석창(姜碩昌) 등과 함께 일찍이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지낸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삼석(李三錫)의 부정 행위와 가렴주구한 사실을 들어 관직을 교체시켰다. 이어 경기도사 조헌경(曺憲卿)도 같은 혐의로 탄핵했고, 지평 김수오(金粹五)도 차례로 교체시켰다.

1666년 공산현령(公山縣令)이 되었을 때, 공산 사람 안국(安國)의 처 의향(義香)이 그의 종 승세(承世)와 간통하여 은밀히 안국을 살해하고 승세와 함께 도주하였다가 안국의 족인(族人)에게 붙잡혔다. 감사가 장문을 올려 보고하자, 서울로 잡아들여 삼성추국(三省推鞫)을 하였는데 모두 자복하여 정형(正刑)을 받았다. 당시에 공산의 관호를 그전대로 강호(降號)하고 그곳 수령 박지(朴贄)를 파직하였다.

1671년에는 사간으로 정언 정유악(鄭維嶽)과 함께 추수철이 가까워옴에 따라 양식이 떨어진 연해읍(沿海邑)들의 기근 대책 마련을 촉구해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그 해 사간으로부터 대간(臺諫)으로서의 직분을 소홀히 했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정언에 복직되고 1672년에는 장령·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역임하였다.

같은 해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있을 때 사간 이압(李押)과 헌납 윤심(尹深)으로부터 입조시 사부(士夫)의 풍습을 잃었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1681년(숙종 7) 사간이 되어서 대사간 윤계(尹堦), 헌납 오도일(吳道一), 정언 이세백(李世白) 등과 함께 관서 지방의 진보(鎭堡)에 소속된 내노비(內奴婢)들의 신역(身役) 감면을 건의하였다.

그래서 오로지 진(鎭)의 일에만 전념하게 해 각 진의 내수용(內需用)을 충실하게 하도록 하였다. 1687년 승지에 이르렀다. 20여 년 가까이 언관(言官)으로 재직하면서 강직하고 사리에 밝은 인품을 지녔다고 한다.

참고문헌

『현종실록(顯宗實錄)』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한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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