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조준도(趙遵道), 편자는 조태호 · 조용진이다.
1845년(헌종 11) 유치호(柳致皜)의 교열을 거쳐, 그의 후손인 조태호(趙泰祜) · 조용진(趙龍震)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연보와 정종로(鄭宗魯) · 강필효(姜必孝)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는 유치호의 발문이 있다. 권1·2에 시 128수, 서(書) 7편, 정문(呈文) 2편, 권3·4에 기(記) 1편, 일록(日錄) 4편, 지(識) 3편, 제문(祭文) 4편, 묘표(墓表) 2편, 묘지(墓誌) 2편, 권5는 부록으로 만사(輓詞) 14수, 제문 2편, 행장 · 묘갈명 · 묘지명 · 유사(遺事) · 제일록후(題日錄後) · 제방호정(題方壺亭) · 제현기서(諸賢記序) · 청포증상언(請褒贈上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에는 정언굉(鄭彦宏), 최산휘(崔山輝), 신즙(申楫), 신타(申柁), 조형도(趙亨道), 조치원(趙致遠), 조함세(趙咸世) 등에게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자일산기(自逸山記)」에는 저자의 호이기도 한 방호의 위치와 경관을 언급한 대목이 있다. 「소회일록(疏會日錄)」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오현승무(五賢陞廡)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때, 호남에서 고경리(高敬履) · 이목(李楘) · 임숙영(任叔英) 등이 이언적(李彦迪)을 반대하자, 그에 반기를 들고 상소했던 일을 일기식으로 같은 해 5월 22일부터 6월 21일까지 기록한 글이다. 「정묘록(丁卯錄)」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청송(靑松)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의병과 군량을 모집한 사실과 그 당시 호란의 전말을 같은 해 1월 20일부터 2월 21일까지 기록한 것이다. 「유경일록(留京日錄)」은 1629년 주부 벼슬로 서울에 있으면서 당시 우리나라와 명 · 청나라 사이에 있던 사실을 지방관이 올린 장계에 의해 보고들은 대로 기록한 것이다. 같은 해 8월 21일부터 1631년 6월 8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정축일록(丁丑日錄)」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향리(鄕吏)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의병 · 군량을 모집한 사실과 당시 호란의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병자년조(丙子年條)는 산실되어 없고, 1637년 1월 1일부터 3월 19일까지 기록되어 있어 인조 때 있었던 호란과 정치 · 외교 등을 연구하는 데 자료가 된다. 이밖에도 서의 별지에는 학문과 경전에 대한 논의와 예설에 대한 분석이 있다. 「정도백문(呈道伯文)」에서는 난리와 흉년으로 고통을 겪는 백성들을 은의(恩義)로 어루만지고, 곡식을 나누어주어서 구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어 당시의 정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제문 중에 한강 정구(鄭逑)에 대해 지은 것은 제자로서 스승을 기리는 마음을 담고 있어 사승 관계를 파악할 수 있으며, 혼척 신지제(申之悌)에 대해 지은 것은 신지제의 『오봉선생문집』에는 실려 있지 않다.
정묘호란 ·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 그 자신의 실제 경험을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높은 자료적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