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사영의 편집을 거쳐, 1938년 달성(현, 대구광역시)의 유연재(油然齋)에서 곽재순이 간행하였다.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1873~1933)에게 이 책의 편찬에 앞서 교정을 부탁하였던 정황이 보인다.
권두에 송준필(宋浚弼)의 서문과 권말에 하겸진(河謙鎭) · 김수응(金粹應)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권2에 서(書) · 잡저(雜著), 권3에 서(序) · 기(記) · 발(跋) · 명(銘) · 잠(箴) · 찬(贊) · 상량문(上樑文) · 축문(祝文) · 제문(祭文) · 행장(行狀), 권4는 부록으로 제가영시(諸家詠詩) · 만사(輓詞) · 제문 · 가장(家狀) · 행장 · 묘갈명 · 묵와계첩서(默窩契帖序)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총 98수가 실려 있으며, 저자가 교유하였던 인물의 시에 차운한 것이나 생활공간 주변의 경물을 읊은 것, 책을 읽고 소감을 적은 것, 사망한 교유인물을 대상으로 한 만시(挽詩)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송준필은 저자의 시에 대해 처음 읽어보면 난해하여 구두조차 떼기 어려울 정도지만 오래두고 음미할수록 좋은 작품이 있다고 하였다. 첫 번째로 실린 시 「묵와」는 저자 자신의 호를 ‘묵와’라고 한 이유를 서술한 서문이 붙어 있다. 주자(朱子)의 수계(垂戒) 시나 『주자대전』을 읽고 지은 시가 실려 있어 주희(朱熹)의 학문과 문학을 존모하는 학자였음이 나타난다.
서(書)에는 김진동(金振東), 종제 곽정곤(郭定坤), 배재기(裵在璣), 노수오(盧秀五), 한사유(韓士愈), 성종순(成鍾順), 곽종석(郭鍾錫), 김규화(金奎華), 김희계(金熙溎), 족질 곽종현(郭鍾玄), 사위 성대원(成大沅) 등에게 준 편지가 실려 있다. 성종순의 문목에 답한 편지에서 천도(天道) · 천명(天命) · 이기(理氣) · 심성(心性) · 형질(形質) · 재지(才知) 등에 대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학설을 인용, 논설하고, 이 두 학설 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자신의 견해를 서술한 것이다. 곽종석에게 준 별록(別錄)은 예설에 관한 문답이다. 세대가 흘러감에 따라 신주(神主)를 옮기고 신주를 고쳐 쓰는 일 또는 종손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였을 때의 제주문제 등에 관해 김장생(金長生) · 이황(李滉) · 이이(李珥) · 정구(鄭逑) · 장현광(張顯光) · 이상정(李象靖) 등의 예설을 참고해 자신의 견해를 붙인 것이다. 곽종석의 『면우집』에도 저자에게 보낸 편지가 여러 통 실려 있으며, 곽종석이 저자를 대상으로 지은 만시(挽詩)와 제문도 수록되어 있다.
잡저의 「신언어절음식(愼言語節飮食)」은 말을 삼가고 음식을 절제해 먹으라는 내용의 논설이다. 「사설(師說)」은 스승이 있으므로 도(道)가 있다고 하지만, 직접 스승에게 배우는 것과 홀로 글을 읽어 사숙(私淑)하는 것이 모두 스승과 도를 믿는 데는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도가 있는 곳에 스승이 있다고 논술한 글이다.
「중용문답(中庸問答)」은 이희발의 『운곡집(雲谷集)』 중에 있는, 정조(正祖)가 『중용』의 요지를 뽑아 문신들과 질의한 내용의 문답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21장에 걸쳐 해설 또는 평론한 것이다.
영남의 주자학자로서 예학(禮學)에 조예가 있었던 저자의 서간문과 정조대 이래 『중용』에 대한 논의의 전파를 보여주는 예로서 「중용문답(中庸問答)」은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