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해에 발생한 삼남 여러 고을의 민란과 합쳐 ‘임술민란’으로 통칭된다. 주모자는 전과자였던 전범조(全範祖)와 불평 향리 김용집(金龍集)이었고, 민란의 주된 요인은 결전(結錢 : 토지의 전결 단위에 따라 부과하는 세금)의 징수에 따른 문제였다.
당시 선산에서도 삼남의 다른 고을들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민폐가 있었지만, 특히 결전의 징수가 과중하였다. 그해 2월에 진주에서 일어난 민란소식에 자극받았던 난민은 4월 2일전범조 등의 선동으로 매결당 8량으로 하는 완문(完文 : 관청에서 발급하는 확인서)을 받아냈다.
이는 퇴직한 늙은 향리 김용집이 산출한 액수였다. 이 문제로 시비가 분분하였으나 사건의 무마를 위하여 파견된 선무사(宣撫使)가 이를 서면(書面)으로 확인, 반포하고, 김용집을 향리의 두목인 수리(首吏)로 임명함으써 난민은 해산하였다.
그 뒤 5월 18일에 전범조가 옥에 갇혀 있던 동료 이예대(李禮大)를 구출하기 위하여 상주로 가던 친비(親裨)를 붙잡아 교환을 요구하자 대구 감영에서는 그를 놓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전범조와 김용집이 곧 체포되어 6월 21일에 처형, 효수됨으로써 난은 종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