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초기, 시(寺)의 명칭을 지닌 6개의 관서에 설치하였던 종4품 관직.
제도/관직
설치 시기
1392년(태조 1)
폐지 시기
1409년(태종 9)경
소속
봉상시|전중시|사복시|사농시|내부시|예빈시
내용 요약

소경(少卿)은 조선 초기에 시(寺)의 명칭을 지닌 6개의 관서에 설치하였던 종4품 관직이다. 조선을 건국한 직후 문무백관의 관제를 정하면서 고려의 관직명을 계승하여 종4품직으로 설치하였다. 관서에 따라 담당한 직무는 다르지만, 장관인 판사와 차관인 경의 지휘를 받으면서 그 관아의 성격에 맞는 실무를 담당하다가 1409년(태종 9)에 부령으로 개칭되었다.

정의
조선 초기, 시(寺)의 명칭을 지닌 6개의 관서에 설치하였던 종4품 관직.
설치 목적

조선을 건국한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28일에 주1관제(官制)를 정하면서 봉상시(奉常寺)에 정4품직 2명, 전중시(殿中寺) · 사복시(司僕寺) · 사농시(司農寺) · 내부시(內府寺) · 예빈시(禮賓寺)에 각각 종4품직을 2명씩 설치하였는데, 이는 고려의 관직명을 계승한 것이다.

임무와 직능

소경이 설치된 6개 관서는 담당한 직무가 각각 달랐다. 그러나 소경이 설치된 각 시에는 상위 관직으로 정3품의 판사(判事) 2명, 종3품의 경(卿) 2명이 있었고, 하위 관직으로는 종5품 승(丞), 종5품 겸승(兼丞), 정6품 박사(博士), 종6품 주부(注簿) · 겸주부(兼注簿), 정7품 협률랑(協律郞), 종7품 직장(直長), 정8품 주2, 정8품 또는 정9품 녹사(錄事), 9품 영사(令事) 등이 관사의 성격과 규모에 맞게 각각의 관직명과 인원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소경은 장관인 판사와 차관인 경의 지휘를 받으면서 그 관아의 성격에 맞는 실무를 담당하였을 것이다.

변천사항

소경은 1409년(태종 9)경 관제 개편 때 경은 령(令)으로, 소경은 부령(副令)으로 개칭되면서 소멸하였다. 그 후 부령은 다시 1414년(태종 14)에 관제 경정 때 소윤(少尹)으로 개칭되었으며, 1466년(세조 12)의 신관제에서 첨정(僉正)으로 바뀌었다.

소경은 명나라의 관직명에도 있었다. 조선 초기, 명나라에서 온 사신 중에는 태복시 소경(太僕寺少卿), 홍려시 소경(鴻臚寺少卿), 광록시 소경(光祿寺少卿), 태재부 소경(太宰府少卿), 상보감 소경(尙寶監少卿) 등이 있었다. 한편 한확(韓確)은 그의 누이[여형(女兄)]가 명나라에 뽑혀 들어가서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의 여비(麗妃)가 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명을 받고 명나라에 갔을 때 광록시 소경(光祿寺少卿)을 제수받았다. 명나라의 소경은 정5품직이었으므로 조선에서는 정3품직에 준한 예우를 하였다.

의의 및 평가

소경은 주로 중국과 고려에서 편제된 관직이다. 조선 초기에 일시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조선의 고유 관직이 마련되면서 소멸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경국대전(經國大典)』
『고려사(高麗史)』
『세조실록(世祖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단행본

한충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인터넷 자료

조선왕조실록사전(http://waks.aks.ac.kr/site/encysillok)
주석
주1

모든 문관과 무관.    우리말샘

주2

종묘나 문묘 제향 때에 초헌관(初獻官)이 술을 따르면 신위(神位) 옆에서 축문을 읽던 사람. 또는 그런 일을 맡아보던 벼슬.    우리말샘

집필자
임선빈((前)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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