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서찬규(徐贊奎, 1825~1905)의 자는 경양(竟襄), 호는 임재(臨齋), 본관은 달성(達城), 출생지는 대구 남산리(南山里)이다.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으로, 임헌회(任憲晦) · 조병덕(趙秉悳) · 한운성(韓運聖) · 홍일순(洪一純) 등과 학문적으로 교유하였다. 1846년(헌종 12)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5차례나 관찰사의 천거를 받고, 암행어사의 추천을 받았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다.
편자는 저자의 문인인 이화상(李華祥)이다.
권1은 시 132제, 권2에는 소(疏) 1편, 서(書) 40편, 권3∼권8에는 서(書) 314편, 권9에는 잡저 1편, 권 10·11에는 잡저(雜著) 19편, 권12에는 서(序) 26편, 권13에는 기(記) 26편, 권14에는 발(跋) 20편, 권15에는 고축문(告祝文) 10편, 제문 14편, 애사(哀詞) 1편, 권 16에는 묘갈명 12편, 묘표 8편이 실려 있다. 권17은 행장(行狀) 7편, 전(傳) 1편, 부록으로 묘갈명 1편, 가장 1편, 가장후(家狀後)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저작순으로 편찬되어 있으며,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시제 「공부(工夫)」와 「서실독좌(書室獨坐)」를 통해 저자의 학문에 대한 진심을 알 수 있다. 과거를 보러 서울을 오가면서 읊은 시와 스승 홍직필의 거주지를 오가는 길에 지은 기행시와 산수시, 저자의 교유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차운시, 증시, 만시 등이 다수를 차지한다.
소의 「청만동묘복설소(請萬東廟復設疏)」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만동묘가 1865년(고종 2) 대원군의 훼철령으로 철폐되자 이를 복원하여 의리의 명분을 세우자고 강조하는 내용이다.
서(書)는 스승 홍직필을 비롯해 학문적으로 교유하던 조병덕(趙秉悳) · 임헌회 · 홍일순 · 최익현(崔益鉉) 등에게 보낸 것으로, 경전(經典)에 대한 질의와 한말의 정세에 관한 논술이 많다. 그밖에 박규수(朴珪壽) · 조두순(趙斗淳) · 신응조(申應朝) · 송근수(宋近洙) · 신석우(申錫愚) · 서헌순(徐憲淳) 등 조정의 높은 관료들에게 현실 타개책에 대한 의견을 담아 보낸 편지가 있다.
잡저 중 「취정일록(就正日錄)」은 홍직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는 동안 경의(經義)에 대해 문답한 내용과 홍직필의 일거일동을 낱낱이 일기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기행(紀行)」은 홍직필이 살고 있던 경기도 노호(鷺湖)에서 출발하여 남한산성 · 문경새재[鳥嶺]를 넘어 충주의 달천(達川)과 탄금대(彈琴臺) · 화양동(華陽洞) · 해인사 등지를 거쳐 대구의 본가로 돌아오는 동안에 보고 느낀 것을 상세히 기록한 기행문이다. 「교성보의(嶠省堡議)」는 일본의 잦은 침략에 대한 방어책을 논한 것으로, 경상도 일원의 요새지에 성을 쌓고 해안 경비에 만전을 기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만필(漫筆)」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의 조화를 이룬 것은 이(理)와 기(氣)임을 전제하고, 이는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고 기 속에 존재하여 기의 주(主)가 된다고 역설하며 이기일원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아울러 천체의 운행과 음양의 변화 원리를 서술하고 있다. 「잡기(雜記)」는 한말의 정치 · 사회적 문제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서(序)는 배영(裵泳)의 『공천유고(孔川遺稿)』 등 교유 문인들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 다수 있다.
기는 달성서씨 문중 정자인 팔수정(八水亭) 등 친인척과 지인들의 정자에 대한 기문이 주를 이룬다.
발에는 부친이 꿈속에서 얻은 8자 ‘충효가모경독세업(忠孝家謀耕讀世業)’과 관련된 「제보장첩후(題葆藏帖後)」와 「가장필첩후(家狀筆帖後)」 등이 있다.
부록에는 최익현이 지은 묘갈명 등이 있다.
개항기와 대한제국기의 혼란스러운 시대를 보낸 저자는 서교(西敎)를 비판하고 위정벽사(衛正闢邪)를 급선무로 삼는 전형적인 유학자의 모습을 보이지만 당대의 정치적 · 사회적 문제점을 다방면으로 고민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어 유학자의 실용적 학문 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