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남경(開京)에 있던 평구역(平丘驛)에서 충주·원주를 경유하여 남한강 상류지역으로 향하던 역로망이다.
『고려사』 권82 병지2 참역(站驛)에, “평구도(平丘道)는 30개소의 역을 관할한다. 평구(平丘)[남경], 봉안(奉安)[광주(廣州, 경기도 광주시)], 오빈(娛賓)[양근(楊根, 경기도 양평군)], 전곡(田谷)·백동(伯冬)[지평(砥平, 경기도 양평군)], 유원(幽原)[원주(原州, 강원도 원주시)], 양화(楊化)[천녕(川寧, 경기도 여주시)], 가흥(嘉興)[충주(忠州, 충청북도 충주시)], 연원(連原)[충주], 황강(黃剛)·수산(壽山)·안음(安陰)[청풍(淸風, 충청북도 제천시)], 단구(丹丘)·안양(安壤)·신림(神林)[원주], 천남(泉南)[제주(提州, 충청북도 제천시)], 연평(延平)·온산(溫山)·정양(正陽)[영월(寧越, 강원도 영월군)], 영천(靈泉)·장림(長林)[단산(丹山, 충청북도 단양군)], 의풍(義豐)[영춘(永春, 충청북도 단양군)], 낙수(樂壽)[평창(平昌, 강원도 평창군)], 신흥(新興)·신진(新津)[황리(黃利, 경기도 여주시)], 창락(昌樂)[흥주(興州,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平恩)·창보(昌保)[강주(剛州, 경상북도 영주시)], 유동(幽洞)[감천(甘泉, 경상북도 예천군)], 도심(道深)[봉화(奉化, 경상북도 봉화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평구도라는 역도 명칭이 『고려사』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 평구역의 역명에서 유래한 만큼, 평구역은 이 역도가 관할하는 30개 역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역이었다. 평구도는 오늘날의 서울에서 강원도 평창군이나 경북 예천군에까지 19개 고을에 걸쳐 30개 역으로 구성되어 관할 구역이 매우 넓었다.
평구도의 주요한 역도망은 남경에서 양근·지평·원주·제주 등의 남한강 수계를 거슬러 단산에 이른 다음, 죽령(竹嶺)을 넘어 경상도의 흥주·강주 등의 지역에 도달하는 경로였다. 물론 양근으로부터 갈라져 천녕·황리·충주·청풍 등을 거쳐 단산에 도달하는 또 다른 주요 경로도 확인된다. 따라서 평구도는 남한강과 인접한 고을을 잇는 역로망을 형성하는 점에서 남한강 수계에 위치한 고을의 수륙(水陸) 교통활동을 지원하면서 죽령을 통한 경상도 북부지역과의 소통로로도 기능하였다.
한반도 중부지역에 분포한 평구도는 한강유역의 광주도(廣州道)·청교도(靑郊道)·춘주도(春州道)뿐만 아니라 강원도 평창군에서 명주도(溟州道)와,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상주도(尙州道)의 역도망와 각각 연결되어 남경-개경으로 이르는 접속 도로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고려시대 평구도는 남경에서 남한강 유역의 원주·충주 등의 고을과 죽령 등으로 향하는 역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경에 위치한 평구역의 이름을 따서 역도 명칭으로 사용한 것은 고려시대 개경 이남 간선 역로망의 편성에서 남경의 중요도가 컸기 때문이다. 즉 남한강 유역의 경기와 충청북도 지역은 물론,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 서부 지역의 고을에서는 남경으로 향하는 평구도의 역로를 통해 개경으로의 교통활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