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은해사 청동북 및 북걸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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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제작된 청동북과 그 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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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에 제작된 청동북과 그 걸이.
내용

조선 전기의 금고는 고려시대에 비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지금까지 확인된 조선 전기 즉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하는 16세기 말까지 작품으로는 일본 쓰시마[對馬島]의 보광사(普光寺)에 있는 청동 금고가 유일하다. 아울러 17세기에 만들어진 금고 역시 수효가 적은 편이다.

은해사 소장의 금고는 1646년에 만들어졌다는 명문을 지니고 있어 조선 후기 금고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다른 작품에 비해 전체 고면의 직경이 72cm에 달하고 있어 대형에 속한다. 금고의 측면은 뒤로 접혀 짧은 전을 형상하고 뒷면에 넓게 공명구가 뚫린 일반적인 형식을 따랐다.

고면(鼓面)은 2줄의 동심원으로 구획하여 중앙의 당좌구는 3중의 연판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그 바깥인 중구(中區)에는 봉황문과 운문을 번갈아가며 3개씩 장식하였다. 가장 외구에는 약간 형태를 달리하는 원형 연화문을 둥글게 돌아가며 12개를 배치하였다. 조선 후기 금고에 빠짐없이 등장되는 범자문에 앞서 고려시대의 연화문과 운문이 잔존하고 있는 과도기적 양상의 작품으로 의미가 있으며 세부의 장식문양도 정교한 수작이다. 측면에는 3개의 고리가 달려있고 후면을 둥글게 돌아가며 연점각(連點刻)으로 ‘신녕지팔공산수도사금고화원(新寧地八公山修道寺金鼓畵員)」○○시주(施主)○○비구(比丘) 순치삼년병술사월초일일백구십근주성(順治三年丙戌四月初日一百九十斤鑄成) 대시주박기(사?)선양주안백길시주김덕(大施主朴己(巳?)善兩主安白吉施主金德), 남야장김암외별좌탁(?)간보체선도,(南冶匠金岩外別座卓(?)幹保体善道) 인학걸보체권화흥익비구혜정비구(人學杰保体勸化興益比丘惠廷比丘) 징휘비구혜휘비구대진(?)(澄揮比丘惠揮比丘大眞(?))’이라는 명문을 새겨놓았다.

명문을 통해 절이름, 제작자 및 제작일시와 중량, 시주자 등을 알 수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신녕의 팔공산 수도사에서 금고를 만든 것이며 제작자로 ‘화원○○’가 기록되었으나 아쉽게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시주자인 ‘○○비구’의 이름과 ‘순치삼년 병술 사월초일’에 ‘일백구십근’의 중량을 들여 주성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어 이 금고가 1634년 원래는 은해사와 인근한 신녕에 위치한 수도사(修道寺)에서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여러 명의 시주자 이름과 특히 야장(冶匠) 김암(金岩)이라는 이름이 보이고 뒷부분에는 함께 참여한 승려들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이 금고의 원 사용처와 함께 17세기 중반에도 금고라는 명칭을 사용한 점과 화원의 명칭을 지닌 제작자 외에 야장이라는 금속을 다루는 또 다른 분업의 장인 이름이 기록된 점이 흥미롭다.

아울러 금고가 걸린 목조의 금고걸이(金鼓虡) 역시 일반적인 조선시대 걸이와 달리 상부를 가로지른 횡목을 볼륨 있는 쌍용으로 조각한 점에서 금고와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함께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시대 청동금고의 연구」(최응천, 『불교미술』9, 1988)
집필자
최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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