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환국 ()

조선시대사
사건
조선 후기 1725년(영조 1) 경종 연간에 있었던 신임옥사(辛壬獄事)를 소론 측의 무고라 판정한 처분.
내용 요약

을사환국은 조선 후기 1725년(영조 1) 소론이 축출되고 노론이 정국을 주도한 사건이다. 영조는 소론을 삼정승에 임명하고 한편으로 노론의 영수격인 민진원을 석방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노론의 재진출이 시작되었다. 환국의 시작은 윤봉조가 소론 측 삼사 관원에 대한 처벌을 요청하여 이들이 축출되고 관직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참의에 윤봉조가 임명된 것이었다. 거기에 민진원이 이조판서가 되며 노론 측 관원이 대거 등용되었고 얼마 후 노론 정권이 구성되었다. 이들은 경종 연간에 있었던 신임옥사를 소론 측의 무고라 판정하고 피해를 본 노론을 모두 신원한 을사처분을 주도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1725년(영조 1) 경종 연간에 있었던 신임옥사(辛壬獄事)를 소론 측의 무고라 판정한 처분.
개설

영조 즉위 직후 정국은 경종대에 이어서 여전히 주1이 주도하였다. 그러나 소론의 주도권은 잠시로, 1725년 1월 영조는 소론들을 축출하고 주2으로서 정국을 구성하였다. 이를 을사환국(乙巳換局)이라고도 한다. 환국 직후 경종 연간에 있었던 주3를 무옥으로 판정한 을사처분을 발표하였다.

역사적 배경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승하하자, 왕세제로 있던 영조가 왕위에 즉위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국은 커다란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1721년(경종 1)과 1722년(경종 2)에 있었던 신임옥사로 많은 화를 입은 노론에게 자신들이 지지했던 영조의 즉위는 재집권의 기회였다.

경과

영조는 즉위 직후 소론의 이광좌(李光佐)유봉휘(柳鳳輝), 조태억(趙泰億)을 삼정승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당시 노론의 영수격인 민진원(閔鎭遠)을 선왕후, 즉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동기라 하여 특별히 석방하였다. 민진원의 석방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노론 세력의 재진출을 위한 포석이었다.

경종 국상의 공제(公除) 직후인 1724년(영조 즉위) 11월 초, 유학(幼學) 이의연(李義淵)이 왕의 구언에 응한 상소를 올리면서 소론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후 동학(東學) 훈도(訓導) 이봉명(李鳳鳴)을 비롯해 경기 유학 최보(崔補) 등 노론 측 인사의 소론에 대한 공격 상소가 계속되었다.

국왕은 일단 소론의 요구를 들어 이의현을 절도에 주4하면서 동시에 왕의 특명으로 붕당을 비호한다는 이유로 소론을 대표하던 김일경(金一鏡)을 삭직, 그날로 바로 절도에 안치하였다. 이의연과 김일경을 같이 처벌하는 방식은 영조가 탕평을 위해 취한 정치운영술인 양치양해(兩治兩解)를 현실에 적용한 첫 사례였다. 뒤이어 임인옥사를 일으킨 장본인인 목호룡(睦虎龍)을 김일경과 함께 참수하였고, 이의연도 옥중에서 죽었다.

1725년(영조 1) 1월 승지 윤봉조(尹鳳朝)가 상소를 올려 소론 측 삼사(三司) 관원에 대한 처벌을 요청한 것을 계기로 소론 측 관원들을 축출하였다. 그리고 능에 행행할 때 패초(牌招)를 어겼다는 이유로 소론의 이조참의 조원명(趙遠命)을 파직하고 윤봉조에게 대신하도록 하였다. 이는 환국의 시작이었다.

이어 노론 측 인원들이 진출하였는데, 민진원을 이조판서로 삼아 그동안 축출되었던 노론 측 관원을 대거 등용하였다. 얼마 후 정호(鄭澔)와 민진원, 이관명(李觀命)을 정승으로 삼아 노론 정권을 구성하였다. 같은 해 3월 정호와 민진원의 요청에 따라 신임옥사를 소론에 의한 무고로 판정하고, 이로 인해 죄를 입은 사람을 일체 신원하는 이른바 을사처분을 단행, 노론 명분의 정당성과 집권의 논리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결과

을사환국과 이어지는 을사처분으로 노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정권을 장악하게 된 노론은 소론에 대해 보복 공격을 하였고, 이로 인해 정국이 계속 혼란스러웠다. 이에 영조는 1727년(영조 3) 주5을 단행, 다시 노론 측을 축출하고 소론 측 인사들을 재등용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구상했던 탕평의 추진을 위해 탕평파를 구축하는데 주력하였다.

의의와 평가

을사환국과 을사처분은 영조 즉위 초 경종 연간 정권에서 배제된 노론 세력의 정치적 진출과 집권 명분을 제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소론에 대한 노론의 보복 공격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영조대 초반의 정국과 탕평책의 추진」(정만조, 『진단학보』56, 1983)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사색당파의 하나. 서인(西人) 가운데 소장파인 한태동, 윤증 등을 중심으로 한 당파이다. 숙종 때에 경신출척 이후 남인(南人)의 숙청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장파와 갈라졌다. 우리말샘

주2

조선 시대에, 사색당파의 하나. 남인(南人)에 대한 처벌 문제로 서인(西人)에서 갈려 나온 당파이다. 숙종 9년(1683)에 송시열, 김익훈 등의 강경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말샘

주3

조선 경종 원년(1721)부터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파의 싸움으로 화를 입던 일. 노론 사대신(四大臣)의 주장으로, 왕의 동생 연잉군(延礽君)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고 나라의 일를 대신하게 하자, 소론이 불가함을 상소하고, 이들 사대신이 역모를 꾀한다고 무고하여 사대신이 극형에 처해지게 하였다. 우리말샘

주4

먼 곳으로 귀양을 보냄. 우리말샘

주5

조선 영조 3년(1727) 정미년에, 당쟁을 조정하려고 정부의 인사를 개편한 일. 노론, 소론을 막론하고 논의가 강경한 자를 제거하고 골고루 등용하였으나, 노론이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게 되어 당쟁을 조정하는 데 미흡하였다. 우리말샘

집필자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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