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환국은 조선 후기 1725년(영조 1) 소론이 축출되고 노론이 정국을 주도한 사건이다. 영조는 소론을 삼정승에 임명하고 한편으로 노론의 영수격인 민진원을 석방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노론의 재진출이 시작되었다. 환국의 시작은 윤봉조가 소론 측 삼사 관원에 대한 처벌을 요청하여 이들이 축출되고 관직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참의에 윤봉조가 임명된 것이었다. 거기에 민진원이 이조판서가 되며 노론 측 관원이 대거 등용되었고 얼마 후 노론 정권이 구성되었다. 이들은 경종 연간에 있었던 신임옥사를 소론 측의 무고라 판정하고 피해를 본 노론을 모두 신원한 을사처분을 주도하였다.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승하하자, 왕세제로 있던 영조가 왕위에 즉위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국은 커다란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1721년(경종 1)과 1722년(경종 2)에 있었던 신임옥사로 많은 화를 입은 노론에게 자신들이 지지했던 영조의 즉위는 재집권의 기회였다.
영조는 즉위 직후 소론의 이광좌(李光佐)와 유봉휘(柳鳳輝), 조태억(趙泰億)을 삼정승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당시 노론의 영수격인 민진원(閔鎭遠)을 선왕후, 즉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동기라 하여 특별히 석방하였다. 민진원의 석방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노론 세력의 재진출을 위한 포석이었다.
경종 국상의 공제(公除) 직후인 1724년(영조 즉위) 11월 초, 유학(幼學) 이의연(李義淵)이 왕의 구언에 응한 상소를 올리면서 소론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후 동학(東學) 훈도(訓導) 이봉명(李鳳鳴)을 비롯해 경기 유학 최보(崔補) 등 노론 측 인사의 소론에 대한 공격 상소가 계속되었다.
국왕은 일단 소론의 요구를 들어 이의현을 절도에 원찬하면서 동시에 왕의 특명으로 붕당을 비호한다는 이유로 소론을 대표하던 김일경(金一鏡)을 삭직, 그날로 바로 절도에 안치하였다. 이의연과 김일경을 같이 처벌하는 방식은 영조가 탕평을 위해 취한 정치운영술인 양치양해(兩治兩解)를 현실에 적용한 첫 사례였다. 뒤이어 임인옥사를 일으킨 장본인인 목호룡(睦虎龍)을 김일경과 함께 참수하였고, 이의연도 옥중에서 죽었다.
1725년(영조 1) 1월 승지 윤봉조(尹鳳朝)가 상소를 올려 소론 측 삼사(三司) 관원에 대한 처벌을 요청한 것을 계기로 소론 측 관원들을 축출하였다. 그리고 능에 행행할 때 패초(牌招)를 어겼다는 이유로 소론의 이조참의 조원명(趙遠命)을 파직하고 윤봉조에게 대신하도록 하였다. 이는 환국의 시작이었다.
이어 노론 측 인원들이 진출하였는데, 민진원을 이조판서로 삼아 그동안 축출되었던 노론 측 관원을 대거 등용하였다. 얼마 후 정호(鄭澔)와 민진원, 이관명(李觀命)을 정승으로 삼아 노론 정권을 구성하였다. 같은 해 3월 정호와 민진원의 요청에 따라 신임옥사를 소론에 의한 무고로 판정하고, 이로 인해 죄를 입은 사람을 일체 신원하는 이른바 을사처분을 단행, 노론 명분의 정당성과 집권의 논리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을사환국과 이어지는 을사처분으로 노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정권을 장악하게 된 노론은 소론에 대해 보복 공격을 하였고, 이로 인해 정국이 계속 혼란스러웠다. 이에 영조는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을 단행, 다시 노론 측을 축출하고 소론 측 인사들을 재등용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구상했던 탕평의 추진을 위해 탕평파를 구축하는데 주력하였다.
을사환국과 을사처분은 영조 즉위 초 경종 연간 정권에서 배제된 노론 세력의 정치적 진출과 집권 명분을 제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소론에 대한 노론의 보복 공격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