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루(禁漏)’인 자격루(自擊漏)와 간편한 휴대용 물시계인 행루(行漏)를 비롯한 주요 물시계의 운용을 담당하였던 핵심 인력은 ‘금루’로 지칭되는 서운관의 금루관(禁漏官)이었다. 왕이 거처하는 궁궐과 도성에서 시간을 알려 주는 보시(報時)가 이들의 주요 임무였다.
1437년(세종 19) 6월 말에 이르러 한양의 시보(時報) 체계를 재정비하였다. 국초(國初) 이래로 사통팔달하는 거리에 종루(鍾樓)를 설치하고, 그 옆에 위치한 의금부(義禁府)에서 물시계를 담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각을 헤아려 해 질 무렵과 해 뜰 무렵[昏曉]에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하였다. 그런데 물시계가 정확하지 않았고, 담당자가 착오를 일으켜 시보에 오류가 많았다. 이에 병조의 담장 안과 월차소(月差所)의 행랑, 중부(中部) 수진방(壽進坊)의 동네 어귀 길가에 전각을 짓고 금고(金鼓)를 설치하여, 궁궐 안 금루가 자동으로 울리는 소리에 따라 북을 쳐서 의금부까지 알리도록 하였다.
조선 왕조의 관제 정비 과정에서 금루는 서운관의 속관(屬官)으로 편제되었고, 그 인원은 1425년(세종 7) 8월에 40인으로 출발하였으나, 여러 차례의 변경 과정을 거쳐 1475년(성종 6) 11월에 30인으로 조정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그대로 등재되었다. 인원 축소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로 자격루의 운용으로 인해 금루관의 공력이 경감되었다고 본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루의 근무 환경이 크게 개선된 것은 아니었고, 금루관만으로 물시계를 운용하기도 어려웠다. 물을 길어 나르고, 매시간 궁궐 안팎에 시간을 전파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조 인력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정조의 생부인 사도 세자(思悼世子, 莊獻世子)에게 제향을 드리기 위한 사당이 경모궁(景慕宮)이다. 사도 세자의 사후에 사도묘(思悼廟)로 불리다가 이후 수은묘(垂恩墓)로 개칭하였고, 정조 즉위 이후에 사도 세자의 시호를 ‘장헌(莊獻)’으로 추숭하고 묘호(廟號)도 경모궁으로 바꾸었다. 1788년(정조 12)경에 유의양(柳義養)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춘관통고(春官通考)』의 길례(吉禮) 부분에는 경모궁의 궁제(宮制)가 기재되어 있는데, 그 부속 건물로 금루청 2칸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종 때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의 병전(兵典)에는 훈련도감의 담당 구역[字內]을 기재한 내용이 있다. 그에 따르면 ‘내궁성파수(內宮城把守)’의 경우 “ 창덕궁(昌德宮)의 홍문관(弘文館) 뒤의 담장으로부터 집성문(集成門) 남쪽 가장자리까지”는 금호문군(金虎門軍)이 파수하고, “금루청 뒤의 담장으로부터 광덕문(廣德門)까지”는 홍화문군(弘化門軍)이 파수하도록 규정하였다. 『육전조례』에 등장하는 ‘금루청’은 「동궐도(東闕圖)」」에 등장하는 ‘금루각기(禁漏閣基)’ 주변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금루각기’를 중심으로 주변에 금루관(禁漏官), 직소(直所), 금루서원방(禁漏書員房), 누수각(漏水閣)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금루청은 왕이 거처하는 궁궐뿐만 아니라 국가 의례를 시행하는 장소에도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각종 제사 의례를 거행할 때 시간 측정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금루청은 국가의 표준 시계인 금루를 관장하는 관상감의 하위 부서였다. 조선 왕조 내내 국가 차원의 시간 관리와 통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엿볼 수 있는 기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