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 상주의 근암리(近菴里)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권심(權深)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로 부사 이달의(李達意)의 딸이다.
학문을 일찍 깨우쳐 20세에 옛 사람들의 독서하는 법과 수신하는 방법을 모아 「학지록(學知錄)」을 저술하였다. 1710년(숙종 36)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으며, 1715년 저작 · 전적 · 직강 등을 역임하고, 1720년 예조 좌랑을 지냈다.
1722년(경종 2) 병조좌랑을 지내고, 1727년(영조 3)에는 만경현령이 되어 이듬해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사전에 탐지해 영문에 보고하고, 난을 토벌해 공을 세웠다. 1731년 영암군수와 사헌부 장령을 지내고, 1733년 양산군수 · 군자감 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을 교열해 간행하고, 이듬해 상소해 민폐 근절책과 관기숙정 방안을 건의했다. 홍문관의 계청에 의해 경연에 참석해 소신을 진술했다. 그 해 울산부사가 되어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고, 구강서원(鷗江書院)을 창립해 학문을 진흥시켰으며, 공씨에게 군역을 면제하는 등 선치를 하였다.
1741년 시강원 필선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45년 봉상시정, 이듬해 사헌부 헌납 · 사간원 사성 · 사헌부 집의 · 동부승지 · 형조 참의 등을 역임하고, 1748년 우부승지로 물러났다.
뒤에 대사간 · 판결사(判決事) · 홍문관 부제학 · 한성 좌윤 · 지중추부사 ·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황(李滉)을 사숙해 「사칠설(四七說)」을 지어 이(理)와 기(氣)를 완전히 둘로 분리하고, 이는 본연의 성이며 기는 기질의 성이라고 주장했다.
저서로는 『청대집(淸臺集)』 18권, 『초학지남(初學指南)』 · 『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 · 『소대비고(昭代備考)』 · 『가범(家範)』 · 『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과 『일기(日記)』 30여 권이 있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죽림정사(竹林精舍) · 근암서원(近菴書院)에 향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