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 면천읍성(唐津 沔川邑城)은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에 있는 조선시대 석축 읍성이다. 읍성이 축조된 것은 1439년(세종 21)으로 그해 2월 축성이 결정되어 11월에 완공하였다. 당시 면천읍성에 대한 기록이 『문종실록』에 자세히 나온다. 면천읍성은 둘레 3,225척, 높이 11척, 여장 높이 3척의 크기로 지어졌으며, 적대 7개소, 성문 3개소, 옹성 1개소, 여장 56첩, 우물 3개소가 있었고, 해자는 부분적으로 굴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근에는 읍성의 성벽, 성문, 옹성 그리고 성내의 객사 등이 복원되었다.
당진 면천읍성(唐津 沔川邑城)은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의 면소재지 대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읍성이다. 성의 축성 과정이 실록에 잘 남아 있어 연해읍성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산성을 쌓으려고 하다가 읍성을 축조한 만큼 산성에서 읍성으로 치소(治所)가 이동한 과정이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그러나 면천읍의 도시화 과정에서 면천읍성이 나날이 훼손되어 읍성의 보존과 정비를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자 정밀 지표조사가 이루어졌다. 아울러 성내에 자리했던 객사나 동헌을 비롯한 여러 건물을 복원하기 위해 건물지에 대한 발굴 조사도 함께 이루어졌다.
당진 면천읍성은 조선 세종 21년(1439) 윤2월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축성을 완료하였다. 이때 완성된 면천읍성에 대해서 『문종실록』에는 둘레 3,235척, 높이 11척, 여장(女牆, 女墻)은 3척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적대 7개소, 성문 3개소, 여장 56개소, 우물 3개소가 있었으며, 해자는 완성된 곳도 있고 미완성인 곳도 있다고 적혀 있다. 면천읍성의 이러한 규모와 부대시설은 조선 후기까지 별다른 변화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여지도서』에는 우물 2개소와 연못 3개소가 있다고 적혀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여지도서』에는 연못의 이름이 군자지(君子池)라고 적혀 있다.
당진 면천읍성은 몽산(蒙山)에서 흘러내린 지맥의 말단부에 성을 축조하여 평지성이나 다름 없다. 성벽의 둘레는 1,564m고, 성벽의 높이는 서벽에서 3.6m 정도가 가장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원래는 성벽의 높이가 11척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만큼 높이가 5.1m 정도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아래에 지대석(址臺石)을 놓고 그 위에 성벽을 축조하였는데, 2.3m 높이까지는 대형석을 사용하고, 그 위 1.2m 정도는 중간 크기의 성돌을 사용하고, 다시 그 위는 그보다 작은 성돌을 사용하였다. 성문은 동문지, 서문지, 남문지가 남아 있고, 남문에는 옹성(甕城)도 있다. 아울러 치성(雉城)도 7개소가 남아 있어 실록의 기록과 일치한다.
한편 1872년에 그려진 「고지도」에는 성내에 객사, 동헌, 군기고(軍器庫), 군사(軍司), 내아(內衙), 내책방, 외책방, 급창방, 사령청(司令廳),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작청(作廳), 장청(將廳), 향청, 내창고, 성황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아울러 '옥천시면(沃川始面)', '진잠시면(鎭岑始面)', '석성종면(石城終面)'과 같은 각자성석(刻字城石)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당진 면천읍성은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읍성 축조 기사 중에서 축성에 대한 논의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읍성이다. 또한 고고학적으로도 세종대의 읍성 축조 방식을 가장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당진 면천읍성은 세종대 읍성의 기본 모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