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명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경상도관찰사,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치회(稚晦)
귀록(歸鹿), 녹옹(鹿翁)
시호
충효(忠孝)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91년(숙종17) 10월 22일
사망 연도
1752년(영조 28)
본관
풍양(豊壤)
주요 관직
경상도관찰사|좌의정|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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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경상도관찰사,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 · 녹옹(鹿翁). 조형(趙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상정(趙相鼎)이고, 아버지는 도사(都事) 조인수(趙仁壽)이다. 어머니는 김만균(金萬均)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13년 (숙종 39) 진사가 되고 1719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721년(경종 1)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주창,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왕세제 보호에 힘썼다. 영조 즉위 후 용강현령, 지평 · 교리를 역임하고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하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종사관으로 종군하였다. 난이 진압된 뒤 그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대사헌 · 도승지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영남의 남인을 무마하고 기민(饑民)의 구제에 진력하였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뒤 1734년 공조참판이 되면서부터 어영대장 · 부제학, 이조 · 병조 · 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40년 경신처분 직후 왕의 특별 배려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뒤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이 때 문란한 양역행정의 체계화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군액(軍額) 및 군역부담자 실제수의 파악에 착수, 이를 1748년 『양역실총(良役實總)』으로 간행하게 하였다. 1750년 영의정에 올라 균역법의 제정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했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을 받아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조문명 · 송인명(宋寅明)과 함께 영조조 전반기의 완론세력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소탕평을 주도했던 정치가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민폐의 근본이 양역에 있다 하여 군문 · 군액의 감축, 양역재정의 통일, 어염세의 국고 환수, 결포제 실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시한 경세가이기도 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진신(縉紳) 사이에 교유가 넓었는데 김재로(金在魯) · 송인영 · 박문수(朴文秀) 등과 특히 친밀하였다. 저서로 『귀록집』이 있고, 『해동가요』에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참고문헌

『경종실록』
『영조실록』
『국조방목』
『당의통략(黨議通略)』
「한국당쟁사」(성낙훈, 『한국문화사대계』 Ⅱ,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5)
「귀록 조현명 연구」(정만조, 『한국학논총』 8, 국민대학교,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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