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충원 ()

박충원의 낙촌집 중 표지
박충원의 낙촌집 중 표지
유교
인물
조선전기 대제학,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이칭
중초(仲初)
낙촌(駱村), 정관재(靜觀齋)
시호
문경(文景)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07년(중종 2)
사망 연도
1581년(선조 14)
본관
밀양(密陽)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대제학|병조판서
정의
조선전기 대제학,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중초(仲初), 호는 낙촌(駱村) · 정관재(靜觀齋). 박조(朴藻)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행주기씨(幸州奇氏)로 기찬(奇欑)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28년(중종 23)에 주1에 합격하고 1531년에 승문원에 올라 홍문관에 참예하였다. 다음해 주2에 돌아가 검열(檢閱)이 되었고, 이어 설서 · 승정원에 전직되었다. 그 뒤 독서하라는 명으로 주3에서 대기하다가 장악직장(掌樂直長)이 되었다.

1534년에 예문관봉교가 되었다가 전적(典籍)이 되고, 이어 정언이 되었다. 다음해 이조정랑 · 사간원정언 · 이조좌랑 · 헌납 ·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 1537년에 병조정랑으로 있다가 이조정랑으로 옮기었다.

조부상을 당해 3년 뒤 다시 승문원교검에 보직되었다가 영월군수로 발령되었다. 이때 이 군에 3태수가 죽어나가 요담(妖談)이 흉흉해 모든 사람이 이곳에 부임하기를 꺼렸으나, 박충원이 초연하게 행동해 기괴한 소문이 사라졌다.

1545년 인종이 중국사신 영접사로 부름을 받아 나가기도 하였다. 그 후 직강(直講)이 되었고, 이어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 사성 · 성천부사를 거쳐 중시에 발탁되어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올랐고, 통례원우통례 겸 교서관판교가 되었다.

1552년(명종 7) 좨주(祭酒)로 있다가 주4주5하였다. 1554년 주6로 중국에 다녀온 뒤 형조참의가 되었고 1556년 세번째 승정원에 들어갔다. 1558년 한성우윤 · 병조좌랑을 거쳐 밀원군 겸 홍문관제학(密原君兼弘文館提學)에 제수되었다. 이어 예조판서 · 사헌부로서 호남 · 호서를 안무하였다. 1564년 명종이 ‘大提學兵曹判書朴忠元(대제학병조판서박충원)’이란 10자를 친필로 하사하였다.

1567년(선조 1) 주7으로 전직되었을 때, 중국에 국사를 검토하는 일로 빈상(儐相)의 명을 받아 기대승(奇大升) · 이후백(李後白) · 이산해(李山海)가 종사관이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그 뒤 여러 중직을 거쳐 정승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며, 저서로 『낙촌유고(駱村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중종실록(中宗實錄)』
주석
주1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 초시와 복시가 있었다. 우리말샘

주2

역사나 일기 따위의 기록을 꾸미던 실록청과 일기청을 통틀어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3

조선 시대에, 승정원에서 주서(注書)가 거처하던 곳. 우리말샘

주4

우리나라 중서부에 있는 도.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땅이었으며, 조선 태종 때에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쌀, 사과, 조기 등이 나며, 명승지로 배천 온천 등이 있다. 면적은 16,447㎢. 북한에서는 현재 황해남도와 황해북도로 나뉘어 있다. 우리말샘

주5

백성의 사정을 살펴서 어루만져 위로함. 우리말샘

주6

조선 시대에, 중국 황제나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보내던 사절. 우리말샘

주7

‘예조 판서’를 달리 이르던 말. 중국 주(周)나라 때에, 나라의 제사를 관장하고 예를 맡아보던 벼슬 이름에서 유래한다. 우리말샘

집필자
신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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