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사영(士泳), 호는 은수당(隱睡堂). 할아버지는 좌참찬 어계선(魚季瑄)이고, 아버지는 사평(司評) 어운택(魚雲澤)이며, 어머니는 종실(宗室) 풍성군(豊城君) 이전(李銓)의 딸이다.
장단에 우거하다가 나중에 광양의 금련촌(金蓮村)으로 낙향하였다. 어릴 때부터 자질이 영오(潁悟)하여 경사(經史)에 능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듬해 계축옥사 때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의 사주로 이위경(李偉卿)·성하연(成夏衍) 등이 폐모를 주장하는 소를 올리자, 여러 유생들과 함께 그들의 이름을 유적(儒籍: 유생들의 가계·학통·학업 등을 기혹한)에서 삭제하고 처벌을 주장하였다.
또한 8도의 유림에 통문(通文: 여러 사람이 돌려 보는 통지문)을 보내 이이첨 등의 처벌을 건의함으로써, 대북파의 미움을 받아 1618년 추방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의금부도사에 등용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괄(李适)의 반란 때는 격문을 띄워 군사를 불러 모아, 반란자들을 토벌할 것을 모의하였다가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대륙의 정세가 심상치 않자 솔선 낙향하였고, 병자호란 후에는 세상을 등지고 두문불출하였다. 뜻과 신념이 탁위(卓偉: 뛰어나게 위대함)하고 언론이 준결(峻潔: 빼어나고 깨끗하여)하여, 한때를 격양(激揚: 격동하여 발분함)하였고 광양의 재지사족(在地士族: 지방에 토착하여 그곳에서 행세를 하는 선비가문)으로서 성리학적 윤리를 실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