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사영(士英). 윤태산(尹太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판 윤잠(尹岑)이다. 아버지는 직장 윤지준(尹之峻)이며, 어머니는 이계창(李繼昌)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진사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검열·형조정랑을 거쳐 1508년(중종 3) 지평(持平), 1509년 집의(執義)·응교를 역임하고 임피(臨陂, 지금 전라북도 군산 일대)에 어사로 파견되었다. 1514년 승지, 1517년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518년 대사헌에 이어 진향사(進香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19년 공조참판이 되었다.
1520년 전라도관찰사로 재임하던 중 조광조(趙光祖)의 죽음을 애도했다는 이유로 김식(金湜)이 유배지에서 도주한 사건에 연루되고 조광조 일파로 몰려 파직되었다. 1524년 평안부사로 치적이 있어 향표리(鄕表裡) 1습(襲)을 하사받았고, 1526년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삼척·진주 등의 지방관으로 전전하였다.
1531년 삼간(三奸)이라 불리던 심정(沈貞)·이항(李沆)·김극핍(金克愊) 등이 파직되자, 다시 중앙으로 등용되어 1532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1537년 성주목사에 이어 1539년 지중추부사·공조판서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를 다녀온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