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무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동지부사, 이조참의,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무경(茂卿)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49년(인조 27)
사망 연도
1708년(숙종 34)
본관
덕수(德水, 지금의 황해북도 개풍)
주요 관직
동지부사|이조참의|호조참판
정의
조선 후기에, 동지부사, 이조참의,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무경(茂卿). 이통(李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참판 이경헌(李景憲)이고, 아버지는 목사 이석유(李柘斞)이며, 어머니는 승지 심로(沈로)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2, 13세에 경사(經史)의 뜻에 통했고 약관에 진사가 되었으나 문과에는 번번이 실패하였다. 1681년(숙종 7)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고, 1689년 영평현감이 되었으나 관찰사와 마음이 맞지 않아 사직하였다. 1691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지평(持平)·정언(正言)·헌납(獻納) 등을 거쳐, 1695년 동래부사가 되었다.

이듬 해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된 후 보덕·강릉부사·사간(司諫)을 지내고, 1698년 시독관(侍讀官)으로서 사전(私錢)의 주조를 엄금하도록 건의하였다. 그 뒤 승지를 지내고, 당쟁은 나라를 망치게 하는 근원이라 하여 배격하였다.

1702년 강원도관찰사 때 양구현 등 여러 군현이 사옹원(司饔院)에서 그릇을 굽기 위해 요구한 백토(白土)의 상공(上供)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양구 지역의 백토가 고갈되어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는 점을 상소해 면제받도록 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또한 대사간 때 정식(鄭栻)이 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를 탄핵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 사건을 편협하게 처리한 사간 윤헌주(尹憲柱)를 탄핵해 파직시켰다.

그리고 신완(申琓)이 사복시(司僕寺)를 관장할 때 간사한 무리의 말을 듣고 당진·태안의 민전(民田)을 빼앗자, 그를 탄핵해 백성들에게 되돌려주게 하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1705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조참의가 되고, 이어 호조참판을 거쳐 1707년 개성유수가 되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집필자
송정현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